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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지서 옛터

  • 제주4·3유적지 안내판이 없는 곳
  • 3·10 총파업에 참여했던 중문지서 경찰, 그 빈자리를 채운 응원경찰의 발포 사건
  • 중문주민 보복학살을 위한 주둔지

<4·3유적지 시민 안내판>

중문지서는 4·3이 발발한 이후 인근지역의 토벌대의 총본부 열학을 했다.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대, 서북청년단, 군인들이 지서를 중심으로 마을 곳곳에 주둔해 토벌을 벌였다.
앞서 1947년 3월 13일 중문지서 주임 양경한 등 제주 출신 경찰 당시 경찰관 6명 전원은 제주읍에서 일어난 3·1 경찰 발포가 부당하다면서 사직하고 '중문면민에게 고함'이란 성명서까지 발표하며 3·10 총파업에 참여했다. 이어 사직한 인원을 메우기 위해 3월 15일 김경술 경위를 반장으로 한 응원경찰 20여명이 중문지서에 배치됐다. 이들은 곧이어 파업에 가담했던 마을 유지들을 구속했고 이에 3월 17일 주민 1,000여 명이 중문지서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경찰이 총기를 발포, 강상준 등 주민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후 중문국민학교와 지서에는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군과 경찰이 주둔하며 참혹한 일들을 자행했다.

한편 무장대는 1948년 11월 5일 중문지서를 습격, 이날 교전으로 무장대3명, 중문지서에 근무하던 경찰관 3명과 군인 1명이 사망했다. 또 중문면사무소를 비롯해 중문지서 주변 민가 40여 채가 불에탔고, 토벌대는 이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주민들을 학살했다.

현재 이 자리에는 중문파출소가 있고, 현재 파출소 건물은 2010년대 초에 기존 파출소 건물의 서쪽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출처

  • 「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 ,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3.
  • 제민일보4·3취재반( 2000),「4·3은 말한다」1, 전예원
  • 제민일보4·3취재반( 2000),「4·3은 말한다」4, 전예원

<어디에 있나요?>

  •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천제연로165, 중문파출소
  • 찾아가려면: 중문관광단지 사거리에서 중문동 우체국 직전에 위치해 있습니다.

<시민지킴이단이 이곳을 조사 유적지로 선택한 이유>

  • 중문지서 옛터에는 4·3유적지 안내판이 없습니다. 현재도 중문파출소가 위치해 주민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지만 이곳에서 발생한 4·3의 역사는 안내되고 있지 않습니다.
  • 제주다크투어와 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 2기는 이곳에 4·3유적지 안내판이 설치되길 바라며, 자세한 역사적 사실을 담은 시민행동을 진행합니다.

<제주4·3과 중문지서>

  • ‘중문리사건’은 1947년 3월 17일 시위군중에게 응원경찰이 발포, 주민 8명이 부 상당한 사건이다. 앞서 밝혔지만 3월 13일 중문지서 주임 양경한(梁慶漢) 등 제주 출신 경찰관 6명 전원은 제주읍에서 일어난 3 1 경찰 발포가 부당하다면서 사직했 다. 당황한 경찰 측은 3월 15일 김경술(金京述) 경위를 반장으로 한 응원경찰대 20 여 명을 중문지서에 배치했다.105) 응원경찰대는 곧이어 총파업에 가담했던 지역 인 사들을 연행했다. 구금자 중에는 지역주민의 신망을 받던 중문중학원 원장 이승조 (李承祚)와 중문민청 위원장 김성추(金性秋)도 포함됐다. 이승조는 일본 간사이(關 西)대학 법문학부 출신으로 해방 후 중문면장까지 지냈으며, 김성추는 일제 때 노동 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던 인물로 해방 후에는 청년운동과 야학운동을 주도해 왔다. 3월 17일 오전 11시 중문면사무소 소재지 중문리 향사에서 지역주민 1,000여 명 이 모인 가운데 면민대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서 3 1사건으로 인한 수감자들을 즉 시 석방할 것을 요청하자고 결의하고, 오후 1시께 중문지서로 몰려갔다. 사태가 심 각해지자 면장 등 지역유지들이 먼저 지서에 들어가 석방교섭을 벌였지만, 응원경찰대는 완강했다. 시위행렬이 지서 앞에 이르자 경찰 지휘관은 해산명령을 내렸다. 여 러 차례 해산 요구에도 응하지 않자 경찰은 발포했다. 이 발포로 강상준(姜祥 俊) 등 지역주민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 129-130쪽)
중문지서원들을 중문면 내 좌익분자들의 부화뇌동하는 데 속아 넘어가 1947년 3월13일 오전 11시30분부터 동일 오후 2시까지 중문지서 사무실에서 지서직원 전원이 3·1사건 대책에 대한 도내 총파업을 실시함에 따라 이에 동조하여 전 지서직원이 파업을 결의한 후 '우리 지서직원 일동은 3·1사건에 부당한 행위를 한 경찰에 봉직할 수 없으므로 직장을 포기한다.'는 불온한 요지의 사직원을 초안결의하여 제2구 경찰서장에게 제출하고 중문지서 직원일동 명의로 중문면민에게 고함이란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우리 중문지서원 일동은 본일까지 치안확보라는 숭고한 정신으로 봉직하여 왔으나 금번 발포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희생적 정신은 수포로 화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 악독한 명령을 복종할 수 없으므로 직장을 떠난다.'라는 요지의 내용을 지서 앞 게시판에 첨부하고 동일 오후 2시경부터 전 지서원은 포기, 파업한 후 각기 행방불명되었다.(후에 강수헌 순경을 제외한 여타 5명은 검거 의법조치)
- '중문지서 파업사건'에 관해서 「 제주경찰사」의 기록
「4·3은 말한다」1, 329쪽
3·1사건이 나자 동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중문은 원래 센 동네였는데, 주민들의 눈총이 따갑고 청년들이 항의하는 바람에 계속 근무할 수 없어서 사직원을 제출하기로 했습니다. 지서직원들은 사직한 뒤 뿔뿔이 헤어졌고, 나는 처가인 위미리에서 가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위미지서에서도 온통 응원경찰이 들어오더니 주민들을 많이 잡아들이더군요. 나도 거리에서 불심검문을 당했습니다. 그때도 내가 '아파서 그만뒀다'거나 '집안사정으로 그만뒀다'하면 별일이 없었을 텐데 무식하고 엿장수 같은 육지경찰들을 보자 오기가 생겨 조금 건방지게 말을 했던 게 화근이 된 것 같습니다.
'왜 경찰을 그만뒀느냐'는 물음에 내가 구체적으로 '3월16일부로 중문지서에서 사직서를 냈다'고 하자, 그들은 '너 잘 만났다'면서 위미지서로 끌고가 무수히 구타했습니다. 얼마 뒤 그 육지경찰들이 나가 버리자 당시 지서에서 제주 출신으로 유일하게 근무하고 있던 이 아무개 순경이 나보고 '도망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무 맞아서 움직일 수가 없자 그가 나를 업고 처가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 사직서를 냈던 한태화 순경의 증언
「4·3은 말한다」1, 330쪽
제주읍 3·1사건 파업 등으로 인하여 중문중학원 원장을 비롯한 민청간부 수명이 경찰지서에 수감되고 있었는데, 17일 오후 1시경 중문리향사에 다수의 면민이 집회하여 3·1사건으로 인한 수감자 사건을 요구하자는 등의 결의를 한 다음 슬로건을 든 중학생을 선두로 일반군중 700여명이 해방의 노래를 부르면서 경찰지서를 향하여 행진하여 지서 앞에 대열하였던 것이다. 이때 이 군중과는 별개로 면장 외 지방유지 등 11명이 지서에 들어가 석방을 교섭하고 있는 중 동지서에 배치되었던 응원경관대는 운집한 군중에 대해 지휘자의 명을 받고 해산을 재삼 경고하였으나 불응하였으므로 군중에게 최후의 권고를 하고 발포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완전히 해산치 않으므로 경관이 위협적 발포를 함에 군중은 일제히 지면에 엎드렸는데 이때 경관대 측에서 일제히 발포하자 군중은 사산(四散)도주하였던 것이다. 수라장화한 가운데서 중경상자가 수명이 났는데, 그중에는 경관의 발포로 인해 중상을 당한자도 있었고, 해산 권고시에 경관이 총으로 해산시키려 휘두를 때 상한자도 있다
- 「제주신보」는 이 사건에 대해서 특파된 김영택(金榮澤), 신창송(申昌松) 두 기자의 기명기사로 위와 같이 보도하고 있다.
「4·3은 말한다」1, 348쪽
그날 중문면의 청년들은 아마 거의 모였을 겁니다. 좌우간 면민들이 지서를 중심으로 길가에 가득 모여서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서귀포쪽에서 스리쿼터 한 대에 탑승한 경찰관들이 운집한 군중들을 헤치며 지서로 오더군요. 그들이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지휘자인 듯한 경관이 지서 성담 위에 올라 '해산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군중들은 '하지 못한다'고 버티었고, 그 경관은 '셋을 셀 때까지 해산하라. 그렇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래도 군중들이 흩어지지 않자 그 경관은 '하나 해산!', '둘 해산!', '셋 해산!'하고 외쳤습니다. 그때까지도 군중들이 동요하지 않자 지휘관의 첫발을 신호로 일제히 발포하기 시작했습니다.
- 그날 총알이 손가락을 살짝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던 강영범씨가 증언한 총격상황.
「4·3은 말한다」1, 349쪽
  • 사건 발생 사흘뒤인 3월20일 경찰고문관 패드릿치 대위와 함께 중문을 시찰한 강인수 제주감찰청장은 당시 발포 책임자인 김경술 경위로부터 발포경위에 대한 보고를 받은 뒤 20여명의 직원을 향해 "그 당시 모든 정세에 비추어 발포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차후에는 일반 민중에게 친절정녕히 하여 경민(警民)일치로써 사태수습에 만전을 기하기 바란다"고 훈시했다고 했다.(「4·3은 말한다」1, 350쪽)
제주도-1947년 3월19일 국립경찰로부터 입수된 정보에 따른 3월21일자 CIC보고에 의하면, 1,000명의 사람들이 제주섬 북동쪽 해안에 있는 중문 감옥에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했다. 그들은 곤봉과 돌멩이로 무장돼 있었다. 군중들이 돌멩이를 던지며 감옥으로 몰려가기 시작하자 경찰이 발사해 4명이 부상당했다. 군중들은 총을 쏘자 해산됐다.
- 미6사단과 24군단 「G-2보고서」
「4·3은 말한다」1, 350쪽
  • <제주경찰사>󰡕에도 그 당시의 경찰 기록을 인용, 군중들이 각목과 돌멩이로 무장했으며, 경찰의 부득이한 발포로 4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이 책자에는 이 사건을 '중문지서 폭도 습격사건'으로 명명, 소제목을 달고 있다. 그러나 제민일보 4·3취재반이 만난 현장 증언자들은 한결같이 각목 등의 무장 뿐만 아니라 돌멩이 습격은 '없었던 일'이며 "그날 시위는 언제까지나 비폭력시위였다"고 주장하고 있다.(「4·3은 말한다」1, 350-351쪽)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 5시께 폭도들의 공격으로 면사무소가 불에 탔습니다. 또 지서와 면사무소 사이 약 30m 안에 있던 집들이 불탔지요. 폭도들은 또 창고를 털어 식량을 마차에 실었습니다. 난 황급히 청년단 사무실로 가서 숙직자와 함께 바닷가로 피신했습니다. 폭도들은 새벽 5시부터 오전 11시께까지 마을을 온통 쑥밭으로 만들고 나서 철수했습니다. 폭도들이 모두 떠난 후에야 모슬포에서 군인들이 왔습니다
- <11월 5일 무장대의 중문지서 습겹 관련> 당시 중문리 우익청년단 단원이었던 김성태씨 증언
「4·3은 말한다」4, 241쪽
중문지서엔 경찰관이 17명 가량 있었고 지서주임은 양정용 경위였습니다. 피습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던 때라 밤새 지서를 경비했습니다. 그렇게 밤을 지새다 새벽 5시쯤 되니까 모두들 ‘오늘은 무사했구나!’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동료경찰 4~5명이 함께 중문리 윗쪽으로 순찰을 나갔습니다. 그 사이에 폭도들이 마을을 덮쳐 지서를 공격했습니다. 일부는 배급용 쌀을 저장하던 창고를 털어 소달구지에 싣더군요. 우린 지서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다가 날이 밝을 무렵에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 당시 중문지서 순경이던 고달진씨의 증언
「4·3은 말한다」4, 242쪽
지서 북쪽은 밭이라 엄폐물이 없어 접근하기 어려웠습니다. 일단 인근에 있던 말방앗간으로 뛰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폭도 2명이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깜짝놀라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총을 쏘았습니다. 이어 2명이 엄호사격하면 2명이 뛰어가는 식으로 겨우 지서에 들어갔습니다. 김석권(성산출신) 순경은 이미 총에 맞아 숨져 있었습니다. 김 순경은 지서 밖으로 나왔다가 폭도 1명과 맞닥뜨렸는데 총격전 끝에 둘다 죽었다고 하더군요. 지서 안으로는 ‘불돌멩이’와 ‘불깡통’이 수없이 날아들었습니다. ‘불돌멩이’란 돌멩이를 솜으로 싼 후 노끈을 길게 매단 것입니다. 여기에 기름을 적셔 불을 붙인 후, 노끈을 빙빙 돌리다 놓으면 꽤 장거리를 날아가지요. ‘불깡통’은 빈 깡통에 화약을 담은 사제수류탄입니다. 폭도들은 지서를 불태우려고 불돌멩이를 던졌지만 지서는 타지않고 지서 주변의 가옥 10여채가 탔습니다. 면사무소와 중문중학교에는 직접 불을 붙였습니다. 폭도들과의 교전이 계속되던중 김호석(회수출신) 순경이 또 희생됐습니다. 절대로 머리를 들지말고 담 구멍을 통해서만 사격하라 했는데 방심했는지 모자가 탁 떨어지더군요. 이마에 정통으로 맞은 것입니다
- 치열했던 무장대와 경찰의 총격전에 대한 오두문씨 증언
「4·3은 말한다」4, 243-244쪽
  • 지서 피습사건 이후 중문리 주민들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 지서가 피습받은 날인 1948년 11월 5일을 시작으로 군인과 서북청년단은 연이어 학살극을 자행했다. 토벌대의 학살은 주민들을 더욱 도피 입산케 하는 결과를 빚었다. 토벌대는 일부 주민들이 피신하자 이번에는 ‘도피자 명단’을 작성해 피신자의 가족들을 색출해 학살했다. 이런 악순환은 중문리에 큰 인명피해를 몰고 왔다.(「4·3은 말한다」4, 250쪽)
서청은 처음엔 비무장이었지만 중문지서 피습사건 이후부터 무장해 중문국민학교에 주둔했습니다. 또 숫자도 30명 가량으로 늘었지요. 서청은 계속 주민학살을 했습니다. 경찰이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난 당시 경찰이었지만 지금도 드는 의문은, 도대체 누가 사설단체인 이들에게 총을 줘 무장을 시켰느냐는 것입니다. 서청은 한라산 토벌 등 위험한 작전을 했다기보다는 주로 마을에서 힘없는 주민을 괴롭히고 학살한 것입니다.
- 중문지서에서 근무했던 이기호씨의 증언
「4·3은 말한다」4, 255쪽
지서피습 사건이 나자마자 마을에 있던 서청 중 일부는 경찰이 됐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지서순경은 모두 제주출신이었는데 상황이 바뀐 것이지요. 서청이 서귀포경찰서로 가서 순경계급장을 달았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곧 중문지서에 나타났어요. 그들은 학력이 낮아 조서 받을 능력도 없었지만 어디서 듣는지 ‘누가 산에서 내려와 숨어 있다더라’는 식의 정보수집은 잘했어요. 같은 경찰이라도 그들은 우리와 협의없이 멋대로 했습니다. 또 서청과 육지출신 군인들로 구성된 특별중대 약 1개소대 병력이 지서 앞마당에 천막을 치고 주둔했습니다. 소대장은 서봉호 소위로 기억합니다.
- 중문지서에서 근무했던 오두문씨의 증언
「4·3은 말한다」4, 255쪽

<중지서 터와 관련된 4·3유적지>

<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 활동>

  • 2022. 10.13. 시민지킴이단 2기 4조 사전답사
  • 2022.10.~12. 유적지 자료조사
  • 2022. 12.15. 시민지킴이단 2기 시민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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