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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2022.10.13. 촬영)
관덕정(2022.10.13. 촬영)

관덕정

  • 제주4·3유적지 안내판이 없는 곳
  • 제주4·3의 중요한 계기인 3·1발포사건이 발생한 곳
  • 4·3 와중 무장대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이 전시되었던 장소

<4·3유적지 시민 안내판>

관덕정은 제주4·3의 도화선으로 평가받는 '3·1 발포사건'이 발생한 장소이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약칭: 4·3특별법) 제 2조 1호에 따르면,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1947년 3월 1일 관덕정에서 발생한 '3·1 발포사건'을 제주4·3의 시발점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1947년 3월 1일, 관덕정 인근 북국민학교에서 열린 3·1절 제28주년 기념식에 3만여 명의 민중들이 모였다. 기념식이 끝난 후 민중들은 관덕정 일대에서 가두집회를 이어갔다. 이 와중에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기마경찰이 어린아이에 대한 구호 조치 없이 경찰서를 향해 가버리자 이 모습에 화가 난 사람들이 기마경찰을 쫓았고 이때 경찰이 발포했다. 당시 제주에는 다른 지역에서 온 응원경찰들이 파견돼 있었는데, 제주 실정을 잘 알지 못하는 응원경찰들이 무분별하게 발포를 함으로써 6명이 사망했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경찰은 경찰서를 습격하려던 자들을 막기 위해 정당방위로 발포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국민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여성이 포함된 사망자들은 시위대라기보다는 3·1절 행사와 시위를 구경하던 관람 군중들이었다.

이날 사건에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1947년 3월 10일, 제주도 전역의 민·관 총파업으로 대응하였다. 이는 공무원을 포함해 직장인 95%가 참여한 전례없는 규모의 총파업이었다. 이 파업에 대해 미군정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Red Island)'로 규정하고 강경하게 탄압하였다. 그 결과 경찰의 가혹한 고문을 받은 주민이 사망하는 사건이 잇따라 3건이나 발생했다. 이는 4·3무장봉기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관덕정 광장은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이 전시된 곳이기도 하다.

참조

  • 제주다크투어 홈페이지
  • 제민일보4·3취재반(2000),「4·3은 말한다」①, 전예원
  • 제주4·3위원회, 2003,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어디에 있나요?>

  •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관덕로 19
  • 찾아가려면 : 제주향교에서 동문시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찾을 수 있다.

<시민지킴이단이 이곳을 조사 유적지로 선택한 이유>

  • 관덕정에는 관덕정의 역사에 관련된 안내판은 설치되어 있지만, 4·3관련 역사를 알리는 안내판이 없습니다. 제주4·3의 주요한 장소이자, 제주읍의 광장이기도 했던 관덕정의 중요한 역사를 담은 유적지 안내판이 필요합니다.
  • 2021년 시민지킴이단 1기 활동에도 관덕정의 4·3안내판 설치를 촉구하는 활동을 진행하였으나 아직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 제주다크투어와 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 2기는 이곳에 4·3유적지 안내판이 설치되길 바라며, 자세한 역사적 사실을 담은 시민행동을 진행합니다.

<제주4·3과 관덕정>

  • 관덕정은 1448년 군사 훈련을 목적으로 제주목 관아의 일부로 세워졌다. 관덕정은 제주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오랜 시간동안 제주 역사의 중심에서 민중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광장으로써의 기능을 해 왔다. 4·3 이전인 1947년 2월에는 제주시내 중·고생들이 관덕정 광장에 모여 '양과자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 관덕정에서는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 중 하나인 제주 4·3의 도화선으로 평가받는 '3·1 발포사건'이 발생했다. 1947년 3월 1일, 3·1운동 28주년을 맞아 관덕정 인근 북국민학교에서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북국민학교에는 3만여 명의 민중이 모였다. 3·1절 기념식이 끝난 후 민중들은 관덕정 일대에서 가두집회를 이어갔다. 이 와중에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해당 경찰은 아무런 조치 없이 현장을 떠났고, 민중들은 이에 항의하며 기마경찰을 쫓았다. 경찰은 쫓아오는 민중들을 향해 총을 발포해 민간인 6명이 죽고 8명이 다치는 일이 벌어진다. 이를 '3·1 발포사건'이라 한다.(「4·3은 말한다」1권, 266쪽)
"동네 어른이 아버지한테 '관덕정 마당에서 행사가 있으니까 같이 가자'라는 말을 듣고 오후 1시께 점심을 먹고 나간 지 얼마 없다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어머니가 '죽으려고 이렇게 왔느냐'고 통곡했던게 기억난다. 그 다음달 동생이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앓다가 4살이 되는 해 죽었다. 남동생도 병으로 죽었다. 바닷가 동네에 살았던 어머니가 잠도 자지 않은 채 바다만 바라보며 멍하게 앉아 있던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 3·1발포사건 전날 일본에서 가족을 데리러 왔다가 관덕정에서 돌아가신 오영수 님의 딸 오추자(인터뷰 당시 80세)씨의 인터뷰
허호준 기자, "제주4·3의 도화선...1947년 3·1사건의 목격자들", 한겨레, 2018.09.23., https://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863262.html
  • 경찰의 무차별적인 발포는 전도적인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공출 제도의 혼란, 친일 관리 재등용 등 경제, 정치, 사회적으로 거듭되는 미군정의 실정 속에서 자국 경찰의 발포로 인명이 상하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제주도는 3·10 민·관 총파업으로 대응했다. 공무원을 포함해 제주도 내 직장 95%가 동참한 전도적인 파업이었다. 제주도청을 비롯해 학교, 운수업체, 은행, 경찰까지 파업에 참여했다. 파업 참가자들은 발포 관련자를 처벌하고 3·1사건 관련 애국인사를 검속하지 말 것, 경찰 내 친일 인사를 몰아낼 것 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러한 민중의 요구를 외면하고,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등 강경진압을 이어갔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제주 4·3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 (「4·3은 말한다」1권, 297쪽)

<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 활동>

  • 2021. 시민지킴이단 1기 시민행동
  • 2022. 10.13. 시민지킴이단 2기 1조 사전답사
  • 2022. 10.~12. 유적지 자료조사
  • 2022. 12. 17. 시민지킴이단 2기 시민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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