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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마을 영남동

  • 정확한 가해 주체가 없는 '잃어버린 마을' 표지석
  • 항쟁과 항일운동의 주역이 살았던 마을
  • 군경 토벌대에 의해 빼앗겨, 지도에서 사라진 마을

<4·3유적지 시민 안내판>

영남동은 예로부터 한라산을 영주산이라고도 불렀는데, 영주산(瀛洲山)의 영(瀛)과 남쪽을 뜻하는 남(南)을 결합하여 ‘영남(瀛南)’이라 하였다. ‘염둔·염돈’이라고도 했다.

4·3 사건으로 폐허가 되기까지 영남리는 리 단위의 독립된 행정구역이었다. 마을을 대표하는 구장이 있었고, 한문을 가르치던 서당도 있었다. 주민 대부분이 일가친척인 16가호가 오순도순 살아가던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예부터 화전을 일궈 보리나 고구마를 재배했고, 숯을 굽거나 사냥하며 살았고 있었다.

주민들은 4·3이 발발한 후에도 한동안 사태와 무관하게 지냈다. 그러나 중산간 지역 초토화작전에 따른 소개령이 발효된 1948년 11월 18일 토벌대가 초토화작전을 벌이며 영남리에 난입했다. 토벌대는 마을이 한라산 밀림지역에 접해 있어 무장대와의 왕래가 있다고 판단해 닥치는 대로 총을 쏘며 주민들을 학살하고 불을 질렀다. 이런 토벌대의 만행에 주민들은 해안 마을로 내려갈 생각은 못하고 마을 위 어점이악 주변의 밀림과 자연동굴에 몸을 숨기며 살았다. 그러나 그 겨울, 토벌대는 눈 덮인 산야를 헤매는 주민들을 즉석에서 총살하고 체포했다. 대부분의 주민이 해안으로 내려가지 않고 마을 부근에서 생활하다 희생됐다. 토벌대는 산 중에서 붙잡은 영남리 사람들을 서귀포로 끌고 내려오다가 길목인 서호리에 들러 학살하기도 했다. 영남리에서는 4·3 사건으로 92명의 주민 중 50여 명이 토벌대에 잡혀 희생됐고, 그 후 마을은 복구되지 못했다. 이곳은 영남동 마을 사람들이 떠나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어 빼앗긴 마을이다.


참조

<어디에 있나요?>

  •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영남동 374
  • 찾아가려면: 제2산록도로의 다리 제4산록교와 제5산록교 중간 남쪽에 '아르도서귀포펜션 신축공사현장'간판이 세워진 곳으로 우회전해서 시맨트길을 따라 200여 미터 남쪽으로 가면 펜 주변에 영남동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터와 군데군데 대나무들이 있습니다. 길을 따라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영남동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나오고, 당시 주민들이 경작했던 농경지를 볼 수 있습니다.

<시민지킴이단이 이곳을 조사 유적지로 선택한 이유>

  • 영남동에는 2001년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위원장 및 제주도지사가 세운 '잃어버린 마을 영남동'이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그런데, 표석 내용에 정확한 가해 주체가 밝혀져 있지 않고, 마을의 풍경 묘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어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 제주다크투어와 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 2기는 이곳에 영남동 마을을 파괴한 가해 주체를 '토벌대'로 명확히 하고, 영남동에서 벌어진 4·3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시민 안내판>을 만들어 시민행동을 진행합니다.

<제주4·3과 영남동>

일제 때는 꽤 여러 가구가 있었는데 점차 줄어들더니 사태 때는 16가호에 92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땅이 척박하고 워낙 고립된 마을이라 형편이 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큰 마을로 떠난 것이지요. 구장은 김창헌 씨였습니다. 서당의 훈장은 김봉성이란 노인인데, 색달리 출신으로 사고무친인 그는 우리 마을에 살면서 한학을 가르쳤습니다. 1948년 음력 5월경에 경비대 9연대 군인들이 마을에 온 적이 있습니다. 까마귀를 맞춘다며 장난 삼아 총질을 했지만 그때는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았습니다. 음력 8월경에는 고근산 뒤편 ‘빌렛내’라는 곳에 주둔한 군인들이 토벌 가면서 몇 차례 마을을 거쳐갔습니다. 그런데 그 즈음부터 행정기관과는 물론이고 다른 마을과의 교류가 완전히 단절되는 등 차츰 분위기가 이상해 졌습니다. 이따금 산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했고 아랫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우리 마을을 거쳐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우리 마을 아무개가 산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들은 주민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옛 예언서에 ‘비산비해(非山非海)’ 또는 ‘산불근(山不近)’이란 내용이 있다며 친족들에게 함께 내려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대로 살아오던 마을을 떠나기가 쉬운 것은 아니지요. 하는 수없이 아버지는 우리 가족만 데리고 어머니 친정 마을인 서호리로 내려갔습니다. 그날이 1948년 11월 18일입니다. 그때까지는 마을에서 아무런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토벌대의 소개명령도 없었습니다.
-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이 벌어지기 직전 마을을 떠난 덕분에 무사했다는 문두현씨(당시 63세)의 마을 상황 설명
「4·3은 말한다」5, 199-200쪽
토벌대는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닥치는대로 총을 쏘면서 불을 질렀습니다. 우리 가족은 마을 위 밀림지대로 도망쳐 겨울을 보냈습니다. 토벌대가 나타날 때마다 뿔뿔이 흩어져 병아리 숨듯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큰할아버지와 큰할머니가 빗발치는 총알에 희생됐고, 큰할아버지가 업고 다니던 동생은 총알이 옆구리를 스치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름도 짓지 않은 어린 남동생은 어머니 젖이 나오지 않아 굶어 죽었습니다. 또 여동생(이명자)은 난리 통에 헤어져 지금도 소식을 모릅니다. 아버지도 붙잡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나와 부상당한 남동생을 데리고 친정 마을로 피해 겨우 목숨을 구했습니다. 고향엔 밭도 있고 소도 많았지만 갑자기 알거지가 돼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남의집 머슴살이를 10년 동안이나 하며 참으로 어렵게 살았습니다.
- 이광찬씨(증언 당시 60세)의 증언.
「4·3은 말한다」5, 200-201쪽
나는 서당에서 천자문과 계몽 편을 끝내고 소학을 읽다가 사태를 만났습니다. 당시 아버지와 큰누나는 일본에 계셨고, 마을에는 어머니가 우리 4남매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마을이 불타고 토벌이 점점 심해지자 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시오름’ 서북방 쪽에 숨어 겨울을 보냈습니다. 그러던중 1949년 1월 10일(음력 12월 12일)에 토벌대에게 들켰습니다. 어머니(朴庚生, 38)는 현장에서 잡혔고, 누나(金順化, 18)와 남동생(金宗洙, 9)은 도망치다가 총에 맞아 즉사했습니다. 나는 12살 난 여동생과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습니다. 우리가 숨었던 곳 부근엔 산사람들의 아지트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딘가에 습격 갔다 오면서 흘린 피가 눈 위에 남아 위치가 발각됐다는 뒷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곳에 있던 산사람들은 전멸했습니다. 나와 여동생은 산중을 헤매다 산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의탁하게 됐습니다. 1949년 2월 22일(음력 1월 25일)에는 큰아버지(金斗行, 75)와 작은아버지(金斗七, 60대), 작은어머니(文汝玉), 사촌누나 김춘선(金春善, 28)과 김춘옥(金春玉, 16), 또 이름도 안 지은 아기 2명과 작은어머니 언니의 가족 등이 함께 숨어 있다가 몰살했습니다. 당시 큰아버지는 환자라서 멀리 피신하지 못하고 마을 부근 굴에 숨었는데, 그 굴은 수직으로 내려가다가 옆으로 뻗은 ‘ㄴ’자 형이었습니다. 토벌대는 총으로 쏴도 소용이 없자 박격포로 굴 입구의 바위를 부순 후 연기를 피워 질식시켰다고 합니다. 그 후 산사람들은 나와 여동생을 큰어머니가 숨었던 어점이악 부근 ‘소님궤’라는 굴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곳에는 큰어머니(李菊), 사촌 김창헌(金昌憲, 영남리장, 30대 후반) 부부, 5촌조카 김승호(金昇浩, 13) 등 10여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도 토벌대에게 발각됐습니다. 1949년 음력 3월경인데 비가 오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토벌이 없겠구나’고 생각해 안심하고 낮잠을 자고 있는데 낮12시경 갑자기 총소리가 났습니다. 눈을 떠 막 도망치려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내 허리띠를 잡았습니다. 그때 김창헌의 아내와 나만 잡히고 나머지는 모두 뿔뿔이 도망치다가 총에 맞았습니다. 여동생(金順玉)도 거기서 희생됐습니다. 난 고근산 부근의 군 주둔지를 거쳐 서귀포 단추공장에 보내졌다가 석방됐습니다. 모두 죽고 나만 살아남았습니다
- 당시 14살 어린 나이였던 김종원 씨(증언 당시 64세)의 증언.
「4·3은 말한다」5, 201-202쪽
우리가 서호리로 온지 얼마 없어 서호지서가 신설됐고, 가끔 토벌갔다오던 군인들이 서호리에 들렀습니다. 하루는 영남리에서 붙잡은 사람들을 서호국민학교로 끌고왔다기에 가 보았지요. 그런데 그 중에 사촌누나(19세)가 있는 게 아닙니까. 군인들은 참으로 인간으로서 해선 안될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누나를 발가벗긴 채 하문에 무우를 쑤셔 대다가 죽창으로 찔렀습니다. 나는 학교 담에 매달려 모두 보았습니다.
- 문두현씨 증언.
「4·3은 말한다」5, 203쪽
  • 1898년의 방성칠 난과, 1901년의 이재수 난에도 영남리 주민들이 참여한 기록이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법정사 항일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영남마을의 기개를 전도에 알렸다. 이 당시 영남리 주민 6명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이 중 김두삼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으나 이자춘 선생은 4·3당시 마을 근처 야산에 숨어 지내다가 군경토벌대에 희생되어 아쉬움을 더한다.(고영철, [향토문화]한라산 남쪽의 첫 마을..영남동 마을터, 제주환경일보, 2019.07.25.)
  • 지금 영남리에는 1960년대부터 외지에서 들어와 대를 이어 거주하는 전대희(1952년 생)씨 형제와, 영남리 마을에 들어선 무주선원라는 암자에 여승 한 분이 살고 있다.(제주일보, 74년 전 제주의 비극에 잃어버린 마을, 2022.06.28.)

<4·3유적지 시민지킴이단 활동>

  • 2022. 10.13. 시민지킴이단 2기 4조 사전답사
  • 2022.10.~12. 유적지 자료조사
  • 2022. 12.15. 시민지킴이단 2기 시민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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