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1일(화)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는 4·3 관련 일반재판 수형인 40명에 대한 직권재심 재판(제4형사부, 김상훈 부장판사)이 열렸고,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약식 기소 벌금형이거나 1년 이하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후 군인이나 경찰에 끌려가 총살당하거나, 육지 형무소로 보내진 후 행방불명되어 아직도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
4월 21일 오전 10시, 제주지방법원은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일발재판 수형인 20명에 대한 직권재심 재판(2025재고합17, 32차)을 진행했고, 20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故 한재은은 1947년 7월 함덕리에 삐라를 배포했다는 혐의 등으로 법령 제19호를 위반에 따른 벌금 3천 원의 판결을 받았다. 그의 아들 한00은 이날 법원을 찾아 그간의 어려움에 대한 진술을 남겼다.
너무 힘들게 살았습니다. 아버님으로 인해서 하루 한날한시에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 부인, 아기 둘까지 사형당했거든요. 그래서 아버님 살아계실 때는 이런 일들에 대해 전혀 함구시켰습니다. 제가 25살 때까지 이런 내용을 전혀 몰랐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조금씩 알게 됐는데 그 조그마한 사건으로 인해서 본인 가족이 몰살당했다는 것에 너무 많은 슬픔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우리 가족은 너무 어렵게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술이었고 술에 취하면 가족을 폭행했습니다. 심지어는 아버지가 밤에 들어오면은 우리들은 아버지를 피해서 텃밭 우영팟에서 잠을 자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재심재판으로 인해서 조금이나마 저희들에게 위안이 됐으면 합니다.- 제주다크투어재판 방청 중 수기 기록
같은 날 오후 2시,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는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일반재판 수형인 20명에 대한 직권재심 재판(2026재고합1, 33차)을 진행했고,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故 현성우는 1947년 11월 가시리에서 무허가 집회를 하여 불온 삐라를 작성했다는 등의 혐의로 포고 제2호 및 법령 제19호를 위반하여 벌금 2천 원의 판결을 받았다. 그는 당시 21세로 가시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던 중 토벌대의 횡포와 무장대의 습격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하려고 자금을 마련하다가 여의치 않자 1948년 가을경 집을 나간 후 가족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1949년 6월경 제주경찰성에 구금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나 1949년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후 소식을 알 수 없는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제주비행장 유해발굴과 유전자 감식 과정을 거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손녀 사위는 이0은 장인자 고인의 아들인 현00을 대신해 증언했다.
아버님께서 사실 당신 부친이 사망하셨다라는 소식도 매우 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까지도 돌아가셨는지를 알 수 없어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2천년대에 제가 제주도에서 군 법무관으로 근무할 때 즈음에 제주공항에서 유골이 발견되어서 그때서야 제주비행장에서 처형이 되신 거구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라기는 저희 장인어른이 저한테 말씀하셨던 게 당신 아버지의 사진 한 장을 구할 수가 없겠냐라는 이야기를 많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돌아가셨던 시점이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여서 아버님 사진을 한 장도 구할 수 없는 상태로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오늘 재심재판으로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고 많은 분들에게 한국 정부가 잘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현명하신 판결을 내려주셔서 좋겠습니다.- 제주다크투어재판 방청 중 수기 기록
제주4·3 희생자에 대한 재심재판을 처음으로 심리한 김상훈 부장판사는 희생자와 유족에 대해 “격었을 고통을 미뤄 짐작간다”라며, 오늘의 퍈결로 “억울함을 풀고 고인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며, 명예회복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무죄판결의 소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