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다크투어에서 4월 28일부터 격주 화요일 18시 5분 제주MBC ‘라디오 제주시대’를 통해 제주4·3 역사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는 <드라마틱한 제주이야기> 유명 관광지, 소설이나 영화를 중심으로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4·3 역사를 소개합니다. 4·3역사에 대한 내용은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와 <4·3은 말한다>, <제주4·3유적>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달하는 것이고, 현지 유적지 관리실태에 대한 내용은 제주다크투어에서 직접 발행한 <다시 쓰는 제주 100년의 역사> 제주지역 다크투어 유적지 국·영문 안내판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내용을 정리해 전달해드립니다.
많은 청취 부탁드리며, 격주 화요일 17시 5분 라디오 주파수 FM 제주시 97.9MHz, 서귀포 97.1MHz에서 만나요!
Q. 오늘 소개할 제주4․3역사는 무엇인가요?
A. 제주4․3의 역사가 최소한의 피해로 종료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라고 평가되는 1948년 4․28 평화협상과 이를 무력화하려는 시도였던 오라리 방화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Q. 그러니까,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 이후에 벌어진 일이죠?
A. 네, 그렇습니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민 일부가 무장하여 봉화를 피우고 12곳의 경찰지서를 습격하면서 본격적인 경찰과 제주도민 간의 무력충돌이 시작됩니다. 무장대는 당시 도민을 괴롭히고, 착취했던 경찰과 서북청년회에 대한 강경진압을 원했고, 미국, 소련 등 강대국들 간에 논의되고 있던 한반도 분단을 막고자 했습니다. 반면, 미군정은 5․10선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Q. 4·28 평화협상은 왜 열리게 되었나요?
A. 제주도민들은 당시의 통치 책임자들에게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통해서, 때로는 파업 등 평화로운 방식으로 미군정에 의사를 전해왔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제주도민을 과잉진압했고, 무장봉기 직전에는 젊은 청년 3명이 연달아 고문치사를 당하기도 했죠. 그래서 무장봉기를 통해 도민들의 바람을 강하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투쟁방식을 오래도록 지속할 계획으로 시작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는 지금 확인되는 무장대의 규모나 사용했던 무기들만 봐도 그렇습니다.
미군정도 5․10선거라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선거 전에 4월 3일이후 발생하는 무장대의 활동을 막거나 진압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양쪽의 필요에 따라 협상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Q. 협상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누구인가요?
A. 무장대의 총책임자였던 김달삼과 현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제9연대의 김익렬 연대장이 협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협상은 김익렬 연대장이 제주주둔 미군정 맨스필드 중령의 요청을 받아 1948년 4월 22일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만들어 비행기를 통해 살포했습니다. 그러자 무장대측은 협상 참여 구성원 등을 통보했고, 미군정과 국방경비대가 이를 수용하여 협상이 진행되었습니다.
김달삼은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미군정과 우익집단에 대한 무력투쟁을 주도한 인물로 동료들과 8월 21일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월북하였기 때문에 비판을 받지만, 협상을 통해 무력충돌의 현실적 출구를 모색했던 인물입니다.
김익렬은 무장대 또는 제주도민을 토벌을 대상이 아니라 경찰이 과오와 죄상을 은폐하려 폭동을 조장 및 확대하였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경질되는 순간까지도 국방경비대가 제주도민을 무력진압하지 않아야 한다는 방침을 고수하였습니다.
Q. 협상이 열렸던 장소는 어디인가요?
A. 대정읍의 작은 마을 구억리에 있던 ‘구억국민학교’가 협상의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억리는 지금 제주영어도시의 중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구억국교도 1948년 11월 21일 당시 군경에 의해 불태워져 없어졌고, 옛 국민학교 운동장 터가 밭으로 바뀌었으며 학교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타운하우스가 들어서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곳의 역사를 알리는 안내판이나 표식은 별도로 없는 것으로 압니다. 아직 평화협상에 대한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라고 하네요. 그런데 2018년에 문화단체 <바람난장>이라는 민간단체가 화단 한 쪽에 표석을 세워 역사를 알리고 있다고 합니다.
Q 평화협상에서 합의된 주요 조건은 무엇이었나요?
A. ①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에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②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 무장해제와 하산이 완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그리고 귀순자는 군이 직접 관리하고 경찰은 배제한다는 것.
Q. 4월 28일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맞는가?
A. 4월28일을 적시하고 있는 자료는 4․3 직전 제주에 근무했던 예비역 장군 장창국씨의 회고록 <육사졸업생>(1984년)뿐이며, 김익렬씨가 예편 이후 쓴 수기에서도 협상 날짜를 4월28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2019년 한겨레가 서울에서 발행한 <국제신문> 1948년 8월6일치에서 4․3 사건 당시 평화협상에서 미군정 쪽 협상대표를 맡았던 9연대장 김익렬 연대장은 “4월22일 국방경비대의 회담 촉구 전단 살포에서부터 29일까지 서로 연락을 주고받은 끝에 30일 낮 12시 안덕면의 산간부락에서 반란군 사령관 김달삼과 회견했다”며 격렬한 논쟁 끝에 △완전 무장해제 △살인 방화 강간범과 그 지도자의 전면적 자수 △소위 인민군의 간부 일체 구금 등 3개항에 합의했다고 적고 있다.
김 연대장이 협상 3개월여 뒤에 직접 쓴 기고문이어서 상당한 신빙성을 주고 있습니다. 평화협상의 성패에 관계없이 토벌작전이 이뤄졌다고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올바로 기록돼야 한다는 점에서 ‘4·28 평화협상’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Q. 왜 평화협상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나요?
A. 5월 1일 이른바 ‘오라리 방화사건’을 계기로 협상이 파기 됩니다. 평화협상 이후 무장대로 추정하되는 사람들이 오라리 연미마을의 집을 불태운 사건입니다. 본래 협상을 통해 72시간 동안 전투를 중지하기로 했는데, 이 협상 내용이 파기된 것입니다. 그러나 진상을 조사해보니 경찰의 지시를 받은 우익청년들이 무장대처럼 복장을 하고 마을을 불태웠다는 것이 이 사건의 진실이었다.
Q. 4·3 당시 오라리는 어떤 마을이었나요?
A. 오라리 마을은 제주 읍내와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산간까지 펼쳐진 상당히 큰 마을이었습니다. 8․15 직후 주민 수가 3,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해방 후에는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마을 주민들이 마을을 이끌었다고 할 정도이니 하귀나, 조천 못지않게 활동적인 마을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라리 마을은 4·3 발발 초기부터 사건이 끊이지 않았던 곳입니다. 3·1절 발포사건으로 6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는데요. 이때 희생된 6명 중 2명은 오라리 마을 주민이었습니다. 이후에 무장대(인민유격대)와 경찰로부터 각각 죽임을 당하는 인명 희생 사건이 몇 차례 발생했습니다.
Q. 경찰은 왜 4.28평화협상을 무산시키려 했나요?
A.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몇 추정은 해볼 수 있습니다. 경찰은 친일경찰 재임용에서 시작하여 고문치사 및 은폐 시도, 4․3의 도화선이 된 3․1절 발포사건까지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기 보다는 강력한 탄압으로 과오를 덮으려는 태도로 일관해왔습니다. 그런데, 국방경비대와 경찰은 서로가 호의적이지 않았고, 미군정 내에서는 경쟁상대이기도 했기 때문에 국방경비대가 주도한 평화협상이 유지되는 것은, 자신들의 과오가 다시 드러나고, 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부담을 앉게 됩니다.
게다가 당시 미군정뿐 아니라 미군, 미 국방부도 각자 입장이 달라, 김익렬을 통해서는 평화적 협상을 추진했으면서도 이후 김익렬 연대장을 경질하고 강경진압할 인물인 박진경 연대장으로 교체하는 등의 과정을 보면 강경 진압의 명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미군은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마을이 불타는 장면을 비행기까지 띄어 영상촬영을 했고, ‘메이데이’라는 영상으로 제작하여 당시 마을을 공격하는 무장대를 소통하는 장면을 연출한 내용이었습니다.
Q. 당시 강경 진압 방침은 협상보다 왜 우선시되었나요?
A. 미군정 내부의 전략적 판단의 결과이겠으나, 4․3 초기 미군정은 협상이 아니라 군경을 통한 강경진압 만으로 제주도의 상황이 조기에 진압될 것이라 판단한 것 같습니다. 미군정 자료에 의하면 미군은 평화협상 와중에도 슈 중령을 조사차 제주에 내려보내기도 했다.
Q. 만약 협상이 유지되었다면 4·3의 전개는 달라졌을까요?
A. 날짜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있으나, 그 부분을 제외한다면, 4․28 평화협상이 유지되었다면, 3만의 제주도민이 희생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당시 협상에 참여했던 그 누구도 제주도민의 무력투쟁과 이에 대한 강경진압이 무려 7년 7개월간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장대 활동을 했던 분들의 증언을 보면 당시에는 공산주의체제의 북한 정부가 한반도를 머지않아 장악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미군정도 협상과 별개로 제주도민을 강경진압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평화협상이 유지되기는 어렵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Q. 오늘 이야기한 역사적 사건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A. 지금 이란에 대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고 있고, 파키스탄을 통해 미국과 이란은 평화협상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에 의한 폭격과 인명살상 소식을 매일 듣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패권국인 미국의 강력한 국방력과 이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동맥을 맺으면 평화가 유지될 것이라는 것이 기존에 우리가 가진 원칙이었다. 그런데, 미국은 이란과 무력 강격진압을 했지만, 이란은 항복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주변 미국의 동맹국들이 이란의 반격에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결국 무기, 강경진압을 통한 평화는 불가능함을 이야기 합니다. 평화적 협상만이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다시금 알려주고 있습니다.이런 역사의 아픔을 잊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생명이 절멸의 대상이 되는 비극을 맞이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