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나요?
A. 오늘은 제주4·3 중 국내 가장 유명한 해돋이 명소인 ‘성산일출봉’ 일대에서 있었던 4·3역사 이야기를 하려고합니다. 여기는 특히, 서북청년회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주둔하면서 발생했던 피해들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Q. 지금은 서귀포시 성산읍이지만, 4·3 당시에는 성산면이었죠. 이곳이 당시에 토벌대의 주목을 받을 만한 일들이 있었나요?
A. 4·3 시기 초기 무장대의 성산지서 습격이 한 번 있었던 것 이외에는 무장대로 인한 별다른 피해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청특별중대가 당시 성산동국민학교에 주둔하게 되면서 성산면과 구좌면 주민들에게는 악몽의 세월이 시작됐습니다. 서청은 툭하면 주민들을 끌고가 매타작을 시작으로 온갖 고문을 자행했고, 그러고 나면 터진목 일대나 우뭇개동산에서 학살했습니다.
Q. 서북청년회를 ‘서청’, ‘서북청년단’이라고도 하는데요. 이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A. 서북청년회는 해방 이후 평안도, 황해도 등 서북 지역에서 월남한 청년들이 반공과 우익 활동을 위해 결성한 극우 반공 청년 단체입니다. 제주 4·3 사건 진압 과정 등에서 폭력적이고 잔혹한 탄압을 주도한 세력입니다.
제주4·3연구소에 의하면, 1947년부터 민간인 신분으로 제주에 들어오기 시작한 서청은 당시 먹고 사는 문제를 ‘현지조달’로 해결했습니다. 이들은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강매하며 주민들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정부는 이들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침묵했습니다. 정부는 서청대원을 증강해 서청특별중대를 편성하고 한림, 월정, 함덕, 성산포 지역에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이들로 구성된 특별부대 100여 명이 1948년 11월 즈음부터 3개월 동안 성산동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성산면뿐 아니라 구좌면의 주민들까지 고문과 학살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산면 희생자의 70%(전체 71명 중)가 이들에게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학살되기도 했습니다.
Q. 서청 특별중대는 주민들에게 정확한 혐의를 가지고 고문이나 총살을 한건가요?
A. 당시 증언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대한청년단 훈련부장임이었던 이기선 씨는
서청 특별중대는 과거 감정이 있던 주민들에게 멋대로 죄명을 씌워 처형했어요. 나도 몇 번 끌려가 손과 발이 묶인 채 장작으로 맞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고문이 심했어요. 거기서 취조는, 그 뭐, 입으로 말할 수가 없어요. 좌우간 무조건 잡아놓으면 두드려 패는 게 일이고. 죽어나가는 사람도 많았어요.- 제주4·3연구소, 제주4·3유적: 서귀포시편, 842쪽 /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⑤, 전예원, 1998, 68쪽
제민일보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에 따르면,
부성순(夫性順, 19)은 축구 선수였는데, 4·3 발발 전에 면사무소에서는 미군 와이셔츠를 체육복으로 개조해 축구 선수 11명에게 지급했습니다. 그런데 서청이 그 체육복을 탐냈으나 이를 거부했던 부성순은 후에 무장한 서청들에게 끌려나와 죽임 당했습니다.
부갑생(夫甲生, 41)은 선전물(삐라)를 갖고 있다가 학살됐습니다. 그런데 그 선전물는 무장대가 아니라 오히려 무장대의 귀순을 촉구하던 토벌대의 선전물이였습니다. 종이가 귀했던 시절이라 부갑생은 이를 주워 집안에 두었다가 발각돼 총살된 것입니다.
수산리에 살던 현순녀(玄順女, 여, 48)씨는 닭을 내놓으라는 서청의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앙심을 품은 서청은 1949년 1월 19일 현순녀 씨가 통금시간을 어겼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초소 부근에서 총살했습니다.
Q. 무장대가 뿌린 선전물도 아닌데, 서청 군인들이 주민을 죽였다는 건 이해가 안되는데요.
A. 서청 중에 문맹자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많은 주민들 사이에는 이씨(李氏)의 성을 두 이자(二)로 적던 서청의 ‘무식함’이 회자되고 있다. 물론 일부 유식자도 있었으나, 당시 도민들은 서청이 무식하여 이런 비극을 자행했다고 여기는 편이었습니다.
Q. 여성들에 대한 서청 특별중대의 횡포도 많았다고 하는데요. 관련 증언이나 기록이 있나요?
A. 제민일보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 중에 고성중 씨는
서청은 참으로 지독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경찰이 나서서 일시 가두기까지 했겠습니까. 주정공장 창고 부근에는 부녀자와 처녀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서청은 여자들을 겁탈한 후 고구마를 쑤셔 대며 히히덕거리기도 했습니다.-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⑤, 전예원, 1998, 69쪽
당시 시흥리 민보단장이었던 강인옥 옹에 따르면,
성산면 시흥리에 살던 60대 중반의 박태수(朴太秀) 할머니에게는 스무살 가량의 오아무개란 손녀가 있었습니다. 당시 아들이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손녀를 데리고 성산포에 있는 딸의 집에 가서 살았지요. 그런데 그 손녀는 주변에 소문난 미인이었습니다. 서청이 그녀를 탐했지만 할머니는 완강히 막았습니다. 화가 난 서청은 오후 2시께 그 할머니를 대로상으로 끌어내 총살해 버렸습니다. 아무튼 서청은 터진목 등지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 오죽했으면 터진목에서 보초 서던 순경조차 계속되는 학살극에 충격을 받아 입이 삐뚤어졌겠습니까. 그 순경은 심방(무당)을 데려다 굿까지 했습니다.-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⑤, 전예원, 1998, 64쪽.
Q. 학교 교사들도 서청 특별중대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데, 어떤 일이 있었나요?
A. 성산리 주정공장 창고에서는 교사들도 대거 끌려와 고문을 받았습니다. 동남국교(당시엔 성산서국민학교)의 등사판이 없어지자 ‘무장대의 삐라 제작을 위해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은 것입니다. 이들도 모진 고문을 받다가 총살됐습니다.
당시 동남국교 교사였던 홍경토 씨도 이때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엿장수나 하던 서청들이 무장을 하게 되면서부터 희생자가 속출했습니다. 난 교사로서 주정공장 창고에 갇혔는데 내 옆에는 형(홍경흥)도 있었습니다. 총살장으로 끌려나가는 형의 발목을 한 번 만진 게 마지막 인사가 됐습니다. 창고 안에는 여러 마을 사람들이 갇혔는데 무자비한 구타와 함께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벌어졌습니다. 남녀를 불러내 구타하면서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의 국부를 불로 지지기도 했습니다. 밤에는 그 썩는 냄새로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습니다. 난 그들이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때 내가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성산국교 정아무개 선생 덕분입니다. 정 선생은 나의 약혼녀였는데 한 달 만에 풀려 나와 보니 정 선생은 차아무개란 서청 간부와 결혼해 있었습니다. 날 살려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겁탈하려던 서청원과 결혼한 것입니다.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는데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⑤, 전예원, 1998, 66쪽.
Q. 정말 잔인하네요. 성산면 수산리에는 이런 서청의 잔혹함을 반증하는 비석이 있다구요?
A. 수산리에는 경찰 토벌대인 충남부대장의 ‘청덕비(淸德碑)’가 서 있습니다. 사태가 거의 끝난 뒤에 주둔했기 때문에 인명을 살상할 일이 없기도 했겠지만 주민들은 서북청년단과 충남부대의 차별성에 큰 영향을 받은 듯했습니다. 수산리 주민 강희제 씨는 이런 증언을 남겼습니다.
서청이 워낙 악랄했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지 않는 충남부대가 고마웠고, 이들을 위해 흔쾌히 기르던 소를 잡았다”-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⑤, 전예원, 1998, 73-74쪽.
Q. 앞 증언에서 언급된 장소 중에 서청 특별중대가 주둔했던 성산동국민학교 말고, 주정공장 창고가 언급되었거든요. 여기는 어디인가요?
A.서청 특별중대는 성산동국민학교 건물에 주둔하며 숙식을 해결했고, 붙잡아 온 주민들을 수감하고 취조하는 곳으로는 국민학교 바로 앞 담장 너머에 있었던 감저창고를 이용했습니다. 당시 한재옥 소유의 절간고구마 창고였습니다. 시흥리 강인옥씨의 증언이 당시 주정공장 창고를 설명합니다.
누런 군복을 입었으나 지휘관을 빼고는 계급장도 없었어. 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한재옥의 창고를 주민 수감처로 사용했지. 그 창고는 절간고구마를 저장하던 창고였는데 술공장이었어. 한 40평 됐어. 그때 내가 들어갈 때는 105명이 있었지. 각처에서 잡아온 사람들이야. 고문하고 했지. 조서라고 하는 거는 살려줄 거는 머리 위에 0치고, 살려 두지않을 거는 X를 쳤어. 그러다 총살할 거면 이제 오후 두 시나 세 시쯤 터진목에 데려가서 팡팡 쏘아버렸지. 사람 하나 죽이는 게 문제라? 뭐, 이유가 없어. 여자들도 같이 가면 죽었어. 여자들… 서북청년한테 몸 희생당한 사람 많았지.- 제주4·3연구소, 제주4·3유적: 서귀포시편, 2021, 850쪽.
Q. 터진목이 성산면의 가장 대표적인 4·3학살터로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 4·3희생자 추모공원도 조성되어 있죠?
A. 네. 맞습니다. 성산일출봉 서쪽 수마포해안에서 검은모래로 유명한 광치기 해변까지 그 사이이가 ‘터진목’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일제강점기 물자 이동을 위해 둑을 쌓기 전까지는 밀물과 썰물에 따라 바닷물에 의해 길이 생겼다 없어졌던 곳이라 ‘터진목’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1948년 11월 초토화 시기부터 2연대가 들어와 토벌작전을 수행하던 1949년 2월까지 이곳에서는 성산면의 여러 마을과 구좌면 하도리 주민들이 대거 끌려와 학살됐습니다. 당시의 학살을 기억하는 분들의 증언을 몇 개 소개하겠습니다.
성산리 주민 이기선씨에 증언입니다.
말 들어보민 터진목 가서 죽이는데 총알이 아깝다고 대창으로 찔러 죽이라고 했다는 그런 말을 들었어요. 순 악질이 었주.- 제주4·3연구소, 제주4·3유적: 서귀포시편, 848쪽
성산면 고성리에 살던 조수삼 씨의 증언입니다.
모두들 혼이 나갔는지 살려 달라고 빌거나 우는 사람이 없었고, 어떤 사람은 목이 탔는지 짠 바닷물을 마시기도 했다. 시신이 바닷물에 쓸려 가기도 했고 목만 남아 뒹굴기도 했다.-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⑤, 전예원, 1998, 65쪽
Q. 터진목 학살 현장에서 생존한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A. 터진목에 어머니 현정생씨의 품에 앉겨 끌려갔다 생존한 오인권(72세, 화북)씨입니다. 1949년 2월 1일, 난산리에 살던 25세 현정생씨는 도피자가족으로 불류되어 생후 17개월 된 아들을 품에 앉고 터진목으로 끌려왔습니다. 아기는 3방의 총상을 입은 채 홀로 살아남아 추운 겨울 바닷가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아기는 성산포에 사는 한 할머니에 의해 극적으로 목숨을 구했습니다.
최근 한겨레와 인터뷰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성산포에서는 학살 현장에서 살아난 아이라며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키워준 보모와 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어머니 시신을 찾아 밭에 묻고 비석도 세웠습니다. 딸을 자기 손으로 묻어야 했던 외할아버지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허호준 기자, (2026.05.16.) 3살 아기는 총탄 세 발을 맞고도 꼼지락거리며 살아났다,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869336.html
오씨는 왼쪽 팔과 오른쪽 팔, 가슴 세 군데에 총상을 입었었습니다. 총상이 심했던 왼쪽 팔에는 지금도 깊은 흉터가 남았고, 손등은 제대로 펴지 못합니다.
"죽지 않을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사격 실력이 나빠 총알이 스쳐 간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몇 번 총을 쏴도 죽지 않으니 ‘이놈은 죽여서 안 되겠다’며 경찰관이 성산포경찰서 앞에 사는 아주머니(보모)한테 ‘이놈 맡아서 키우다 나중에 임자 나타나면 돌려주라”며 맡겼다고 하더군요.”- 허호준 기자, (2026.05.16.) 3살 아기는 총탄 세 발을 맞고도 꼼지락거리며 살아났다,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869336.html
경찰은 약품과 먹을 것을 갖다줬다고 합니다. 오씨는 중학교 졸업 때까지도 보모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오씨를 친자식처럼 아꼈던 보모는 20여년 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오씨의 아버지|(오명언)는 경찰로 근무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아버지의 이후 행방은 알 수가 없다가, 4·3 당시 집단학살 매장지였던 제주공항에서 유해발굴이 이뤄지던 2009년 행방불명자 유족들을 대상으로 한 유전자 검사에 참여했습니다. 2014년 어느 날 제주4·3평화재단으로부터 발굴된 유해 가운데 아버지 유해가 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오씨의 할머니는 오씨가 다섯 살 때인 1951년 12월 수소문 끝에 손자를 찾아 데려갔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마친 뒤 배움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답니 . 부모의 부재와 4·3에 대한 침묵 속에서 젊은 시절 부산에서 자살시도를 할 정도로 방황했으나, 지금의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며 4·3의 진실을 몸소 알리는데 앞장서고 계십니다.
Q.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될만큼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성산일출봉 그 아래에도 학살터가 있다구요?
A. 일출봉 북쪽 끝자락에 우뭇개해안이 있고, 그 상단의 언덕을 ‘우뭇개동산’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1949년 1월 2일, 오조리 주민 20여 명이 다이너마이트 사건으로 집단총살됐습니다. 해방 후 일부 해안마을 주민들은 일본군이 버리고 간 다이너마이트를 어업용으로 사용습니다. 또한 9연대 주둔 당시만 해도 군의 허락하에 1948년 겨울철부터는 민보단에서 마을 경비용으로 사용하려고 초소에 보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연대로 교체되고, 서청 특별중대가 들어온 후인 1948년 12월 29일, 다이너마이트를 소지하고 있던 한 주민을 끌고 온 서청은 오조마을 주민들을 공회당에 모이게 하고는 집집마다 수색하면서 집합이 늦은 주민들을 끌어내 성산포 감저창고로 데려갔습니다.(이날 끌려간 사람 중에는 마을책임자인 구장 고태종과 민보단장 흥성강도 끼어있었음) 이날 서청이 주민들을 연행한 이유는 다이너마이트로 자기들을 죽이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이들은 고문취조를 받다 며칠 후인 다음해 1월 2일, 우뭇개동산에서 학살됐습니다. 서청은 이날 총살현장에 성산리 유지들은 모두 나오라고 해서 총살을 구경시켰습니다. 현재 이곳 우뭇개동산에서 학살된 주민은 모두 23명으로 확인됩니다.
참고문헌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말한다 5, 1998, 서울:전예원.
제주특별자치도, 제주4·3연구소, <제주4·3유적2:서귀포시편>, 2021 , 제주:도서출판 각.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서울: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허호준 기자, (2026.05.16.) 3살 아기는 총탄 세 발을 맞고도 꼼지락거리며 살아났다,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86933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