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까요?
A. 4·3생존후유장애인이었던 진아영 할머니 관련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Q. 무명천 할머니로도 알려지신 분이죠?
A. 네, 맞습니다. 4·3 당시 총탄에 아래턱을 잃어 죽을뻔 했으나 생존하셨어요. 그러나 아래턱을 상실해 이 부위를 무명천으로 감싼 채 사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진아영’이라는 예쁜 이름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무명천 할머니’라고 불렸습니다.
Q. 아래턱이 없다니 상상도 하기 힘든데요. 4·3 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A. 먼저 할머니의 고향 판포리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요즘 ‘판포’가 다이빙 성지인 ‘판포포구’ 때문에 유명하죠. 제주 서쪽 한경면 에메랄드빛 투명한 바다를 가진 해안가 자연마을인데요. 일주도로 위쪽에 있지만 그렇다고 중산간이라고 하기에는 해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아 4·3 당시에는 소개지역에서 제외된 마을이었습니다.
제주4·3연구소에 따르면, 이따금 경찰이 마을에 들러 구장을 불러낸 뒤 그의 딸에게 자기 아버지 뺨를 때리게 하는 등 모욕을 주었지만, 4·3이 발발한 지 9개월이 지나도록 인명피해 없이 비교적 평온함을 유지했던 마을이에요.
그러나 1949년 초에 접어들면서 토벌대는 주민들에게 마을을 빙 둘러 성을 쌓게 했고, 마을 주민들은 매일 밤 보초를 섰습니다. 그러던 중 1949년 1월 13일 밤, 무장대가 습격해오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판포리에서는 첫 인명피해 사건이면서 가장 큰 희생을 몰고 온 사건인데요. 사건이 나던 날은 음력 12월 보름으로 달이 밝았지만 주민들은 처음 겪는 ‘난리’에 당황했어요. 성문은 쉽게 열렸고 마을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식량을 약탈하러 난입한 무장대는 출동한 경찰의 총소리에 습격한지 약 30분 만에 황급히 도망치게 됩니다. 이 와중에 주민 11명이 희생되고 여러 명이 부상을 당하게 되는데요. 이 때 당시 36세 진아영 할머니도 아래턱에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Q. 무장대와 토벌대 사이의 싸움에서 무고한 주민이 희생된 거네요.
A. 네, 무장대에 의해서 희생당한 분도 있고, 경찰이 가한 총격에 희생당한 분도 있습니다.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의 『4·3은 말한다』에 이날의 상황에 대한 증언이 있는데요. 이날 무장대가 휘두른 칼에 목 부상을 당했던 진완석 씨의 증언입니다.
폭도들은 철창과 칼을 들고 있었고 총은 갖고 있지 않았다. 주민과 폭도가 뒤섞여 있는 혼란스런 상황에서 경찰이 마구 총격을 가하다 보니 애꿎게 당하기도 했다.-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1998.06.19.) 4·3은 말한다.
Q. 그 후 진아영 할머니는 어떻게 되셨나요?
A. 이 일로 진아영 할머니 부모님이 희생당하셨습니다. 할머니는 병원치료를 전혀 받지 못하고, 턱이 상실된 상태로 집에서 한달 반 동안 생사를 오가며 앓아 누워계셨다고 합니다. 대충 싸맸던 턱도 감염을 막기 위해 하얀 무명천으로 싸매기 시작했구요. 혼자가 된 할머니는 혼인 후 옆 마을에서 사는 친언니의 도움으로 월령리로 거처를 옮깁니다. 마침 월령리에는 사촌도 살고 있어서 의지 가지가 되셨을 거에요. 그런데 70년대 말 언니마저 세상을 떠난 후 홀로 사시다가 병환이 깊어져서는 성이시돌요양원에서 지내시다 2004년 9월 8일에 90세로 돌아가셨습니다.
Q. 생을 달리했던 4·3희생자분들도 안타깝지만 장애를 안고 평생을 살아야 했던 후유장애인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A. 아래턱이 없으니 발음도 잘 되지 않았고, 글도 배우지 못해 의사소통도 어려웠고요, 제대로 음식을 씹을 수도 없어 소화불량과 영양실조에 시달려 사셨습니다. 물리적 고통도 힘든데 정신적 트라우마도 심해서 옹색한 살림살이인데도 어디 외출할 때면 방문이며 집문이며 꼭 자물쇠로 잠그고 다녔다고해요. 집앞 돌담에 나가 사람을 기다릴 때에도 문마다 자물쇠를 채우셨습니다. 피해의식에 시달려 누군가 자신의 것을 모두 가져간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Q. 그러면 할머니께서 생계는 어떻게 이어가셨나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A. 다치기 전에는 해녀였고, 젊은 시절 해녀일을 하다가 후유증으로 난청까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턱에 장애가 생기고 나서는 물질을 하기 어려워 바닷가에서 톳이나 미역, 우뭇가사리 같은 해조류나 선인장 열매인 백년초를 채취하며 생계를 이어가셨다고 합니다.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생기고 나서는 수급자로 인정받아 생계비지원을 받으셨습니다.
Q. 그래서 월령리에 진아영 할머니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하던데요. 소개해 주시죠.
A. 월령리에 <진아영 할머니 삶터>가 있습니다. 바로 할머니가 사시던 공간인데요. 마당에는 손수 키웠던 선인장이 아직도 자라고 있고요. 집 안에는 생전에 쓰시던 그릇이며, 냄비, 이불, 옷 등등 살림살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방에는 할머니 생을 다룬 영상물을 볼 수 있게 모니터를 설치해 놨어요. 누구든 언제든지 찾아와서 할머니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Q. 그렇군요. 할머니가 살던 공간이 이렇게 보존되기까지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A. 할머니는 생전에 결혼도 안하셨고,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할머니의 집은 여러 친척들에게 소유권이 넘어갔어요. 그런데 제주주민자치연대 등 제주에 있는 시민단체들과 주민들이 할머니의 삶터를 허물기보다는 잘 보존해보자는 차원에서 직접 성금을 모았고, (사)진아영할머니삶터보존회를 꾸려 지금까지 할머니의 삶터를 관리하고, 알려오고 있었습니다. 약 28평 정도의 대지와 5.5평의 집의 재산상 소유권 문제도 할머니의 유족분들이 2023년에 제주특별자치도에 기부채납하면서 이제 제주도도 함께 제주4·3 후유장애인이자 생존자였던 할머니의 삶터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Q. 진아영할머니 삶터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A. 매년 제주주민자치연대 주관으로 자원활동가들을 모집해 마당에 풀도 베고 집안을 쓸고 닦는 삶터 지킴이 활동이 있습니다. 이렇듯 공식적으로는 제주특별자치도와 무명천 진아영할머니 삶터보존회, 제주주민자치연대, 한림읍 월령리 마을회 등이 힘을 합쳐서 관리하고 있는데요.
사실 도민 모두 자발적으로 틈틈이 돌보고 있습니다. 제주다크투어도 기행 코스로 방문하거나 평소에 시간을 내어 방문해서 마당에 물도 주고, 집안 청소도 하면서 관리에 손을 보태고 있습니다.
Q. 그럼 아무나 삶터에 방문할 수 있나요?
A. 네. 아무나, 아무 때나 방문이 가능합니다. 할머니 집 대문이 제주도 전통방식의 정낭으로 되어 있는데요. 늘 한쪽 막대기가 모두 내려가 있어요. 들어오셔서 안채 문을 열고 할머니 집에 들어가보시면 됩니다. 가시면 할머니가 주무시던 방과 주방으로 구분되어 있는데요. 방에는 1998년 김동만 감독이 제작한 『무명천 할머니』라는 다큐영상을 보실 수 있구요. 할머니에 대한 시, 생전 사진, 생활도구를 보실 수 있어요. 주방으로 오면 여러 살림도구들이 있고, 그간 방문해주셨던 분들이 놓고 간 편지, 추모글, 방명록이 있고, 향을 피울 수 있는 추모공간이 있습니다. 가실 때 문단속만 잘 해주시면 됩니다.
Q. 누구랄 것 없이 함께 가꾸고 지키는 모습을 진아영 할머니가 보시고 무척 반기고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오늘이 9월 1일입니다. 8일이면 할머니 기일이네요. 추모제나 관련 행사가 있을까요? 소개해 주시죠.
A. 8월 24일부터 9월 4일까지 <진아영 할머니 삶터>에서 제주4·3평화재단의 공식 대학생 서포터즈인 <제주동백서포터즈>가 삶터 도슨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주 토요일, 9월 5일에는 추모문화제가 있습니다.
돌아가신 이듬해부터 매년 추모문화제를 해오고 있는데요. 올해는 월령리 해변무대에서 오후 2시부터 제주 예술인 릴레이 추모 음악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후 6시부터 8시까지 추모문화제가 열릴 예정입니다. 부대행사로 플리마켓, 제주 전통음식 무료체험도 있으니 관심 가지시고 꼭 방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Q. 진아영할머니와 같이 4·3으로 희생되신 경우도 많지만 생존했으나 부상을 당해 영구적인 장애를 갖게 경우는 더 많았겠어요.
A. 네, 제주4·3으로 희생자로 추정되는 수는 2만5천 명에서 3만 명입니다. 2026년 4월 기준, 인정받은 제주4·3희생자는 15,218명입니다. 이분들 중에 사망자, 행방불명인, 수형인, 후유장애인이 포함되는데요. 혹시 이 희생자 내에 제주4·3후유장애인으로 등록된 분이 몇 명일 것 같으세요?
Q. 진상조사보고서에 희생자 규모를 2만 5천~3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니 적어도 수천 명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A. 후유장애인으로 등록된 분은 224명입니다.
Q. 224명이요? 너무 적은 숫자 데요. 이유가 뭔가요?
A. 우선 후유장애인 조사가 2000년에 『제주4·3특별법』이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제정·공포되어서야 시작이 되었어요. 이미 많은 분이 돌아가신 후였죠. 그래서 2026년 4월 현재까지 공식 등록된 희생자 중에 사망자는 10,753명 / 행방불명인 3,796명 / 수형인 445명 / 후유장애인 224명으로 후유장애인은 그 수가 현저히 적습니다.
Q. 또 다른 이유가 있나요?
A. 4·3으로 인해 장애를 얻었다는 것을 희생자 당사자가 입증하게 되어 있습니다. 4·3 당시에는 의사는커녕 수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면 운이 좋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4·3기간에 장애를 얻을 만한 질병이 있었고, 이를 치료했다는 진단서 등 증빙 기록이 있을리 없습니다. 누군가 증언을 해준다고 해도 50여 년의 세월 뒤에 그 또한 쉽지 않죠. 게다가 현행 후유장애의 인정 범주가 신체장애에 매몰되어 있어서 진아영할머니가 겪었던 트라우마 같이 정신적 장애는 아주 미온적으로만 인정하는 문제가 큽니다.
Q. 이렇게 후유장애인으로 인정빋기도 어려운데, 4·3희생자를 대상으로 지급되는 보상금도 차등지급된다고 알고 있는데요. 맞습니까?
A. 2021년 「제주4·3특별법」 전부 개정으로 4·3희생자에 대한 보상금이 균등하게 지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정부는 사법부의 기존 배상 선례라며 후유장애인에게는 신체 장해등급에 따라 차등지급하도록 정했습니다.
Q. 일반적인 장애인등급제까지 폐지가 되었는데, 제대로된 보상에 문제가 있지 않나요?
A.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요. 앞에서 지적했던대로 정신적 피해는 여기에 아예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있구요. 결국 장애를 가졌으나 살아남았다는 부분이 조건이 되어 보상금을 적게 받는 것이 타당하지 않습니다.
제주 4·3 특별법 개정의 핵심은 개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긴 소송을 벌이기 어려우니, 국가가 책임을 인정하고 대승적인 차원에서 '일괄 배·보상'을 책임지겠다는 보편성과 평등성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정 편의주의적으로 일반 민사소송의 '산재 등급(1~14등급)' 기준을 가져오면서, 과거사 청산이라는 특별법의 숭고한 취지가 일방적으로 훼손되었습니다.
게다가 생존 희생자들 사이에서 '너는 몇 등급이냐', '누구는 얼마를 받았다더라' 식의 불필요한 비교와 상대적 박탈감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는 4·3 유족 공동체와 마을 공동체 내부에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을 뿌리는 부작용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진아영할머니, 무명천 할머니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4·3희생자 중에서도 후유장애인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4·3희생자의 명예회복에 대한 많은 사회적 지원이 늘어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장애에 대한 인정범위가 적고, 보상도 차등적으로 지급된다고 하니 시민들의 관심을 통해 지속적인 제도개선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참고문헌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1998.06.19.) 4·3은 말한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4·3연구소, <제주4·3유적1:제주시편>, 2021 , 제주:도서출판 각.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서울: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평화재단, 피해실태, https://jeju43peace.or.kr/kor/sub01_01_02.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