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제주생명평화대행진 2일 차(조천~구좌) 후기
8월 28일 아침 7시 40분, 아직 햇살이 채 내려앉기도 전이었지만 조천체육관 마당은 행진을 앞둔 참가자들로 북적였다. 한편에는 이곳에서 지난 밤을 보낸 참가자들의 짐가방이 즐비하게 쌓여 있었고, 계단에 걸터앉은 이들의 얼굴에는 2일 차 여정을 앞둔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고 있었다. 연대의 노래와 율동으로 몸을 깨운 참가자들은 깃발을 나눠 들고 길을 나섰다. "생명평화 강정마을", "제2공항 결사반대" 등의 문구들이 바람에 펄럭이기 시작했다. 안전을 위해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한 걸음씩 발을 내딛는 긴 행렬이 조천을 출발해 앞으로 나아갔다.
첫 번째 코스는 함덕리사무소까지 35분을 걷고 20분을 쉬는 일정이었다. 고요하던 조천의 아침 길을 지나 함덕에 들어서자 한산했던 거리에 일상의 풍경들이 들어왔다. 등교하는 학생들과 출근길 시민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긴 행렬을 바라보았고, 한 가게의 상인은 따듯한 응원의 박수를 보내오기도 했다. 파출소에서도 참가자들을 위해 흔쾌히 화장실을 개방해 주며 길 위의 연대에 온기를 더했다. 리 사무소 마당에서 취한 휴식 시간, 한쪽에서 기타 반주와 함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광명 YMCA에서 온 학생들이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흥을 돋우고 있었다. 쉬고 있던 참가자들이 그 주위로 모여들어 구경하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다음 코스를 위한 숨을 골랐다.
이어지는 두 번째 코스는 북촌리사무소까지 50분 동안 걷고 30분을 쉬게 된다. 함덕해수욕장 근처의 번화한 버스 길을 지나 다시 한적한 길로 접어들자, 무지개색 경계석 너머로 익숙한 풍경이 들어왔다. 제주 4·3 당시 단기간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낳았던 북촌 너븐숭이 일대다. 평소 기행으로 자주 다니던 익숙한 길이었지만, 수많은 참가자의 거대한 호흡이 길 위에 더해져 조금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애기무덤', '옴팡밧', '북촌초등학교', '당팟'을 차례로 지나 북촌리사무소에 도착했다. 한살림에서 후원해 준 시원한 아이스크림으로 더워진 몸을 조금 식힐 수 있었다. 8월 말이었음에도 올해 더위는 유독 혹독했다. 구름에 해가 가려질 때는 그나마 견딜만 했지만, 뜨거운 햇살이 드러날 때면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래도 걷고 쉬기를 반복하는 짜임새 있는 일정 덕분에 많이 지치지 않고 나아 갈 수 있었다.
세 번째 코스는 김녕요트투어까지 70분간 이어지는 가장 긴 구간이었다. 동복리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푸른 해안도로를 따라 걸었다. 제주도에 살며 늘 마주하는 바다이지만, 길 위에서 만나는 바다는 언제 보아도 반갑다. 좁은 해안도로의 특성상 대열은 자연스럽게 두 명씩 한 줄로 길게 늘어섰고, 그 긴 행렬 위로 "해군기지 폐쇄하라", "제2공항 설러불라", "주민투표 실시하라" 등의 구호가 울려 퍼졌다. 마이크를 잡은 육지 참가자들과 외국인 참가자들의 발언이 이어지며 제주의 아픔이 단지 이 섬만의 문제가 아님을 일깨워주었다. 행렬의 풍경은 다양했다. 여전히 기타를 메고 반주와 노랫소리를 이어가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작은 북을 치며 중얼중얼 기도를 올리는 듯한 일본인 참가자들의 묵직한 발걸음도 있었다. 한편에서는 학생들이 끊임없이 장난을 치기도 하고 엄마와 함께 참가한 어린아이들은 지친 기색도 없이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이틀째 행진으로 몸은 이미 많이 지쳤을 텐데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힘든 여정을 즐겁게 참여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다리에 통증이 오고 종아리에 경련이 일까 봐 신경을 쓰며 걸었던 나 역시, 뒤따르는 45인승 냉방차의 신세를 지지 않고 무사히 김녕에 도착했다. 30분간의 휴식 시간, 참가자 개인의 후원으로 마련된 이온 음료로 수분을 충전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마지막 숨을 골랐다.
마지막 코스는 점심 식사가 기다리는 구좌체육관으로 향하는 45분간의 여정이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최종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닷바람에 힘차게 펼쳐진 깃발 그리고 한목소리로 외치는 구호와 함께 마침내 구좌체육관에 도착했다. 체육관에는 이미 도착한 짐들이 빼곡히 쌓여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곧이어 시작된 점심시간에는 정성 가득한 풍성한 한 상이 차려졌다. 비건식인 야채김밥과 신선한 샐러드, 돼지고기볶음, 아삭한 겉절이, 나물 반찬에 뜻밖의 떡볶이와 시원한 수박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이 폭염 속에서 백여 명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땀 흘리셨을 자원봉사자들의 노고에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든든하게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의 일정은 여기서 끝이 났다. 단 하루, 짧은 시간 동안 동참했을 뿐이지만 길 위에서 느낀 여운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묵묵히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 속에서, 나는 제주의 자연과 평화를 온전히 지켜내려는 단단한 연대의 마음을 보았다. "평화야! 고찌글라(같이가자)"라는 슬로건처럼, 우리가 함께 걸어갈 때 비로소 평화의 길도 열린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겨본다. 오늘 보탠 작은 발걸음이 제주의 생명과 평화를 지키는 작은 이정표가 되었기를 바라며 일상을 준비한다.
글: 제주다크투어 허성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