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주실 건가요?
A.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제강점기때 군사시설로 조성되었다가 제주4·3때는 학살 및 암매장지로 쓰였고, 제주도를 찾는 누구든 거쳐해야 하는 제주국제공항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Q. 제주국제공항의 옛 이름이 ‘정뜨르 비행장’이었죠? 일제강점기에는 어떤 역할을 했나요?
A. 정뜨르비행장은 제주서비행장 또는 제주비행장으로도 불렸습니다. 일제강점기 군사적 기능을 위해 아직도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모슬포의 알뜨르비행장 다음에 건설된 군사비행장입니다. 1942년에 건설을 시작해 1944년 5월 준공이 되었고, 대형 비행기도 이창륙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고, 완공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제주도민을 동원해 공사를 끊임없이 했던 공간이었습니다.
Q. 지금의 제주국제공항이 사실은 일제강점기때부터 군사 비행장을 쓰였다는 말씀이군요. 해방 이후에도 비행장으로 사용되나요?
A. 그렇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미군에 의해 해방을 맞이한 한반도는 아시다시피 남한지역은 미군이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미군을 중심으로 무장해제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제주도에는 1945년 9월 28일 미군 비행기가 제주서비행장에 착륙하면서 본격적인 항복접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제주비행장에 비축했던 군량미를 모두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Q. 그런데, 어떻게 제주4·3 때는 학살터이자 매장지가 되었나요?
A. 정뜨르비행장은 상시적 학살터였습니다. 넓은 부지에 비행장 시설도 많지 않아 으슥한 공간이 많았다고 합니다. 여기저기서 수시로 학살이 이루어졌고, 몇 차례의 집단학살도 있었어요. 그러나 자료나 증언이 부족해 학살의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실정입니다. 거기다 4차에 걸쳐 확장공사를 벌인탓에 암매장지 일부가 훼손되기도 했고요.
Q. 단순한 학살장소가 아니라 군인들이 제주도민을 총살한 후, 집단매장도 이루어졌나요?
A. 관련 증언을 통해 몇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제주4·3기간 중에 1948년과 1949년 두 차례의 군법회의가 진행됩니다. 이중 1949년 군법회의는 한라산에 피신해 있다가 하산해 제주도내 각지 수용소에 감금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열렸습니다. 1949년 6월 23일부터 7월 7일까지 총 10차례 개최되었는데, 이 군법회의를 통해 민간인 1,659명에 대해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선고했고, 문서상으로는 이중 345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실제 사형으로 기록된 249명에 대해서 1949년 10월 2일 제주비행장 근처에서 총살이 진행됩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459-460)에 기록된 당시 총살집행을 직접 목격한 허균 제1독립대대 소대장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우리 중대가 제주비행장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나는 어느 날 제주비행장의 벌판에 호를 크게 2개 파고 반도들을 사형 집행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약 200~300여 명 정도가 눈을 가리운 채 총살되었는데, 이들을 묻었던 무덤이 나중에 얼마쯤 내려앉았던 기억이 납니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459쪽
제주4·3 진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1949년 말에 2연대에서 제1독립대대로 변경됩니다. 그들은 군인들에게 사복을 입힌 채 각 기관에 잠입시켜 함정을 파 도민들을 잡아들였습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당시 부대장이었던 김용주씨의 증언이 담겼는데요.
거기에서 잡은 것을 재판을 하면 거의 사형인데 그것을 나보고 처치하라 이겁니다. 그러니 내가 그 사람들한테는 죽일 놈이지…. 계엄사령관 앞으로 데려온 걸 어떻게 해요. 그래서 법에 의한 구성을 만들어 가지고 제주비행장 서쪽에 굴을 파고 거기서 전부 처치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은 제주도에 못 가게 됐습니다. 난 명령대로한 거지만 그 사람들은 나보고 죽였다고 할 것 아니야. 그래가지고 제주도가 완전히 평정이 됐지요.-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335쪽
결국, 재판 절차도 없이 총살을 했다는 말입니다. 1948년 12월 31일로 계엄령이 해제되었는데, 김용주 씨는 여전히 ‘계엄사령관’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Q. 이렇게 당시 제주도민을 학살했던 군인들의 증언이 있는데요. 2000년대 들어서 「제주4·3특별법」도 제정되고, 진상조사보고서도 나오면서 이후에 제주국제공항에서 유해발굴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맞습니까?
A. 제주국제공항 말고도 화북천 인근, 별도봉 일본군 진지갱도, 도두봉, 선흘리 등 매장된 곳에 대한 증언이 많이 축적되고 있었습니다. 「제주4·3특별법」 제정 이전에는 섯알오름 예비검속 학살터와 남원 의귀리 현의합장묘가 이미 유해발굴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003년 3월 4·3위원회가 진상조사보고서 초안을 확정하면서 채택한 대정부 7대 건의사항에 유해 발굴 조항이 포함되었습니다. ‘집단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사업을 지원하되 유해 발굴 절차는 희생자와 가족의 존엄성과 독특한 문화적 가치관을 충분히 존중해 시행해야 한다’라고 명기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는 2006년 정부의 유해발굴 예산 10억 원이 확정되었고,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인근에는 2007년 1단계 발굴, 2008~2009년 2단계 발굴, 2018년에 3단계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Q. 제주국제공항 유해발굴의 결과가 어땠나요?
A. 제주4·3평화재단의 「제주4·3추가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 1단계 발굴은 공항 남북활주로 서북지점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곳에는 1950년 8월, 6·25 한국전쟁 당시 군인들에 예비검속되어 수백여 명이 학살되어 암매장 된 것으로 추정되었던 곳입니다. 이미 공항 확장공사 과정에서 유해가 훼손 및 유실된 상황으로 파악이 되었는데요. 유해 128구와 도장등 유류품 659 점이 발굴되었습니다.
Q. 도장이 나왔다면 도장의 주인인 희생자도 확인이 되었나요?
A. 총 2점의 도장이 나왔는데요. 하나는 ‘양봉석’ 한자이름이 적힌 것으로 유해의 가슴부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확인 결과 그는 1950년 6월 26일 예비검속되어 서귀포경찰서에 끌려간 후 행방불명된 희생자였습니다. 그는 당시 의귀국민학교 교사라 도장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발굴 당시 고 양봉석씨의 동생 양봉천씨가 제주의소리에 인터뷰한 기사가 있습니다.
처음에 형님의 도장과 유골이 나왔다는 전화를 발굴팀으로부터 받고 하염없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끊임없이 눈물만 줄줄 흘러내리고 제대로 소리내 울지도 못했다. 그런줄도 모르고 형님의 유해를 찾으려고 일본 대마도까지 다녀왔다. 이제야 마음편히 형님의 유골을 모실 수 있게 됐다- 제주의소리, 2007.11.14.
또 다른 도장에는 ‘희전’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었는데요. 확인 결과, 1950년 8월 모슬포 감자창고에 수감됐던 대정국민학교 교사 김희전(당시 24세, 서귀포 호근)씨를 희생 당사자로 추정했습니다. 당시 4학년 담임을 맡던 김희전 교사가 사용한 비슷한 크기의 결재인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같은 기사에서 김희전 씨의 조카 김관수 씨도 인터뷰를 했습니다.
연락받고 매우 놀랐다. 당시 모슬포 섯알오름서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이렇게 유품이 여기서 나오고 보니 저희들도 이제야 70~80% 확신하게 됐다- 제주의소리, 2007.11.14.
Q. 이후 공항 유해발굴 결과도 말씀해주시죠.
A. 2008년에 시작된 2단계 유해발굴은 공항 남북활주로 동북측 지점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곳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1949년 군법회의의 민간인 희생자 249명과 일부 9연대 사병들이 총살·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여러 추정지점에 대한 증언이 있었으나 과거 지적도까지 동원하여 암매장 구덩이를 확인하였고, 259구의 완전유해와 1,311점이 유류품이 발굴되었습니다.
2018년 3단계 유해발굴에서는 공항 내 5 여러 곳의 시굴조사를 시행했는데, 아쉽게도 암매장 유해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항 인근 도두동 유해발굴이 진행되었는데, 이곳은 1973년 공항 확장공사 중에 노출된 유해를 종이에 싸서 이곳에 2차 매장했다는 증언을 토대로 진행되었는데요. 결국 성인 유해 2구와 10대 초반 아이 유해 1구, 2-3세로 추정되는 영유아 유해 1구가 확인되었습니다.
Q. 제주국제공항 활주로에서만 387구의 유해가 발굴되었는데요. 이후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희생자 유해가 있나요?
A. 공항 활주로 유해발굴이 시작된 2007년부터 제주도와 평화재단, 유족회를 중심으로 유가족 채혈 및 감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유전자 감식 기술이 발전되면서 지속적으로 유해의 가족이 확인되었고, 2018년 기준 총 387구의 유해 중에 131구의 신원이 확인되었고, 올해 초에도 1구의 시신이 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2008-2009년에 진행된 공항 2단계 유해발굴에서는 지난 8월 성산일출봉 4·3이야기에서 소개해드린 4·3생존후유장애인 오인권 씨의 부친 오명언씨의 유해가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2014년에 유전자 감식결과로 확인되었는데, 고 오명언씨는 4·3 당시 난산리 출신으로 성산포지서 순경으로 근무하다 주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겠다며 3개월 만에 사직 후 피신생활을 했다가 1949년 군법회의를 거쳐 제주공항으로 끌려가 학살되었던 것입니다.
역시 2단계 유해발굴로 확인된 고 진재남 씨는 안덕면 상천리 출신으로 2023년 9월 21일 제주지방법원의 직권재심재판으로 무죄판결을 받은 희생자입니다. 당시 제주다크투어가 재판을 방청하며 아드님의 증언을 기록했는데요.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고 자랐다. 그런데 커가면서 연좌제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의 모든 공직은 연좌제로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서울로 가서 60년 만에 내려왔다. 서울에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많이 원망스럽다. 정말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무죄가 선고된다면, 억울하고 분하지만 세상 원망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하겠다.- 제주다크투어, [재심재판 방청후기] 38차 재심재판
2024년 1월 16일, 재심재판으로 무죄선고를 받은 고 오성도씨는 남원 의귀리 출신으로 1949년 군법회의를 거쳐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되었습니다. 그의 손자 오00씨는 법정에서 증언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제주농업학교 다니는 학생이었다. 무죄라고 주장했는데도 사형을 당했다. 10년 전에 제주공항에서 DNA검사로 할아버지의 유해를 찾았다. 지금이라고 무죄가 밝혀져 감사하다- 제주다크투어, [방청후기] 4·3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
2026년 4월 21일 재심재판을 통해 무죄선고를 받아 명예회복한 고 현성우씨도 2단계 유해발굴에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21세로 표선 가시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던 중 토벌대의 횡포와 무장대의 습격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하려고 자금을 마련하다가 여의치 않자 1948년 가을경 집을 나간 후 가족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1949년 6월경 제주경찰서에 구금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나 1949년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후 소식을 알 수 없는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법정을 찾은 그의 손녀 사위가 고인의 아들인 현00을 대신해 증언언을 전합니다.
아버님께서 사실 당신 부친이 사망하셨다라는 소식도 매우 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까지도 돌아가셨는지를 알 수 없어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2000년대에 제가 제주도에서 군 법무관으로 근무할 때 즈음에 제주공항에서 유골이 발견되어서 그때서야 제주비행장에서 처형이 되신 거구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라기는 저희 장인어른이 저한테 말씀하셨던 게 "아버지 사진 한 장을 구할 수가 없겠냐"라는 이야기를 많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돌아가셨던 시점이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여서 아버님 사진을 한 장도 구할 수 없는 상태로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제주다크투어, 아버지의 생전 사진 한 장 구할 수 없을까요?
Q. 남겨진 증언을 통해서 제주 비행장에서 총살·매장된 분들이 유해발굴로 진상규명이 되었고, 유전자 감식을 통해 일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요. 재심재판을 통해 무죄선고를 받아 추가적인 명예회복까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주비행장 유해발굴을 통해 추가적으로 규명된 진실이 더 있나요?
A. 제주4·3평화재단의 「제주4·3추가진상조사보고서」(524-527) 에 따르면, 2007년 1단계 공항 유해발굴과 신원 확인을 통해 유해의 상당수가 서귀포경찰서와 모슬포 경찰서 관내 예비검속 희생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서귀포경찰서 예비검속 희생자의 유족 대부분은 희생자들이 정방폭포 일대에서 수장학살 당한 것으로 알고 2004년 12월 서귀포 하원동에 ‘삼면원혼 위령제단’을 마련하여 추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슬포경찰서 예비검속 희생자들도 섯알오름에서 모두 희생된 것으로 알았으나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인근에서 유해가 발견되어 관련 유족들의 답답함이 일부지만 해소된 측면이 있습니다.
2008-9년 2단계 공항 유해발굴에서 살짝 언급했는데요. 당시 대대분의 유해는 군법회의를 거쳐 총살된 민간인 희생자들이었는데요. 유전자 감식을 통해 9연대 군인을 포함됐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과거 관련 미군보고서에서도 확인되지만, 당시 총살된 군인들은 10명으로 추정되는데, 장병들은 재판도 없이 제주비행장에서 총살·암매장 된 것이 공식 확인된 것입니다.
끝으로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 있는데요. 1단계 공항 유해발굴에서 신원 확인될 것이라 기대했던 제주경찰서 예비검속 희생자의 유해가 단 한 구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시 증언에는 바다에 수장 학살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공항 쪽으로 다수의 트럭이 이동했다는 증언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공법 규정의 제한으로 발굴을 진행하지 못한 활주로 밑이나 인근에 아직 유해가 남아있을 수 있어 우리가 앞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Q. 이런 제주국제공항 유해발굴과 아직 활주로 아래 남아있을 유해의 아픔이 다양한 문학작품에서도 다뤄졌는데요. 대표적으로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또한 제주도 대표 시인 중 한 분인 김수열 시인이 2006년에 발표한 <바람의 목례>라는 시집에 “정뜨르 비행장”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김잔디 대표께서 싯구 한구절 준비해 오셨다구요?
정뜨르 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 변하고
하루에도 수만의 인파가 시조새를 타고 내리는 지금
‘저 시커먼 활주로 밑에 수백의 억울한 주검이 있다!’
‘저 주검을 이제는 살려내야 한다!’라고
외치는 사람 그 어디에도 없는데
샛노랗게 질려 파르르 떨고 있는 유채꽃 사월
활주로 밑 어둠에 갇혀
몸 뒤척일 때마다 들려오는 뼈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빠직 빠직 빠지지지직
빠직 빠직 빠지지지직
이따금 나를 태운 시조새
하늘과 땅으로 오르내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잠시 두 발 들어 올리는 것
눈 감고 창밖을 외면하는 것- 김수열, '정뜨르 비행장' 일부
참고자료
강순원, 『 태평양 전쟁기 제주도 주둔 일본군과 군사시설』, 2006.
김봉현 기자, 「도장 주인, 당시 교사 김희전.양봉석 씨...유족 확인」 , 『 제주의소라 』, 2007.11.14., https://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39404(검색일: 2026.09.22.)
제주다크투어, 「[재심재판 방청후기] 38차 재심재판」, 홈페이지, 2023.09.13., https://www.jejudarktours.org/ko/news/재심재판-방청후기-38차-재심재판/
제주다크투어, 「[방청후기] 4·3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 홈페이지, 2024.01.18., https://www.jejudarktours.org/ko/news/방청후기-44-45-군사재판-직권재심/
제주다크투어,「 아버지의 생전 사진 한 장 구할 수 없을까요? 」, 홈페이지, 2026.04.29., https://www.jejudarktours.org/ko/news/아버지의-생전-사진-한-장-구할-수-없을까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4·3연구소, <제주4·3유적1:제주시편>, 2021 , 제주:도서출판 각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서울: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사건추가진상조사보고서1』, 2019, 제주:도서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