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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9일(화) 제주지방법원 201호에서는 제주4·3 관련 일반재판 수형인 20명에 대한 직권재심재판(제4형사부, 김상훈 부장판사)가 열렸고,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날 변호인 김정은은 최종의견에서 재심재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4·3 당시 제주는 전쟁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섬 전체가 공포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평범한 일상을 살던 사람들이 아무런 일도 모른 채 연행되고 도움받고 희생되었습니다. 논밭을 갈던 농부가, 아이를 가르치던 부자가, 아제 막 결혼을 앞둔 젊은이가 재판에 나갔습니다. 이 사건 피고인들은 기록에 의하면 피의자이지만 밖에서는 한 가정이 아버지, 어머니이고, 아들이며 학생입니다.
- 제주다크투어 재판 방청 중 수기 기록

그러면서 몇몇 4·3 희생자의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故 김상은은 포고 제2호 및 법령 제19호 위반으로 징역 6월 및 집행유예 3년, 벌금 2천 원에 처하는 판결을 받았다. 그는 1947년 3월 11일 외도국민학교에서 교원들과 파업 추진위(3·10총파업)를 조직하고, 12일 파업 단행을 위한 성명서와 결의문을 발표했다는 공소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변호인에 따르면 이호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였고 약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청년이었다. 부친이 토벌대의 총에 쓰러지고 마을이 소개되자 가족들과 산으로 피신했고 그후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故 홍중석은 내란방조죄 및 법령 제19호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의 공소사실은 1948년 6월 중순 무렵 자택에서 폭도를 위한 식량과 자금을 제공하고, 10월 21에 애월면 하귀리 근처 일주도로에 돌을 쌓아 도로를 차단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변호인에 따르면, 그는 토벌대에 협조하던 민보단으로 군경합동 토벌작전에 참여하고 귀가한 날, 하귀지서에 출석하라는 명령을 받고 아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故 안상보는 법령 제19호 위반으로 벌금 3천 원의 약식명령을 선고받았다. 그는 1947년 8월 12일과 16일에 삐라를 살포하였다는 혐의였다. 그는 당시 오현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으며, 3·1운동 전단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아들은 이날 아버지의 무죄를 확인하기 위해 재판을 방청했다.

故 오남해는 포고 제2호 및 법령 제19호 위반으로 벌금 3천 원에 처하는 약식명령을 받았다. 그의 공소사실은 1947년 7월 중순부터 1948년 2월까지 안덕면 창천리에서 남로당 조직을 목적으로 여러 차례 무허가집회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는 토벌대에 연행되어 재판을 받고 벌금을 내고 풀려났다. 그리고 한국전쟁에 자원하여 참전하였고, 재대후 고향에서 살다가 1968년에 사망하였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참전했던 인물이 이 유죄의 낙인을 앉은 채 살다 돌아가셨다. 그의 손자와 며느리가 무죄판결 재판정에도 참석하였다.

故 강팽성은 총 두 번의 재판을 받았다. 첫 재판에서는 포고 제2호 및 법령 제19호 위반죄로 1947년 중문국민학교 운동장에서 3·1절 기념행사 및 시위행렬을 준비하고 참여하였으며, 3·10총파업 관련 활동하며 중문지서 경관에게도 파업 참여를 협박했다는 등의 혐의였다. 또 한 번의 재판은 같은 법 위반으로 벌금 3천 원의 약식명령을 받았다. 그는 2번 정도 여러 사람과 모여 무허가집회를 하였다는 혐의였다. 이날 재판에는 그의 아들 2명과 손자 1명이 참석하였다. 그의 손자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늦었지만 저희 조부님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힘을 써주신 재판부와 검사, 변호사에게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저희 조부께서는 해방 전에 일본에서 유학하고 해방을 맞으면서 고향으로 돌아와 어려운 사람들을 치료하고 교육활동을 하겠다는 애향 애민의 정신을 가족들을 데리고 귀향하셨습니다. 실종되기 전 나이가 40세가 안 되셨을 때인데요. 타지에서 입신양명할 기회가 분명히 있었음에도 애향 애민의 정신을 가지고 고향을 왔는데, 해방 전후에 좌우의 극심한 이데올로기 대립에 아까운 나이에 운명하신 것으로 알고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직 조부님의 유해를 확인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오늘 재판이 있기까지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기록을 찾으려 갖은 노력을 했지만, 개인이 옛 기록들에 접근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사실 조부님의 재판이 한건인 줄 알았는데, 두 건이라는 것도 얼마 전에 알았습니다. 유족 입장에서는 할아버지는 유해를 찾지 못한 상태고, 오늘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명예를 일부를 회복을 하겠지만 아직 규명되어야 할 사실들과 이런 내용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족들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 제주다크투어 재판 방청 중 수기 기록

김 변호인의 최종의견 말미에 무죄판결을 요청하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이 사건에서 검사는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을 입증할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였습니다. 기록의 원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당시 재판의 실체를 말해줍니다.
우리는 지금도 민주주의 가치와 절차가 얼마나 소중하며,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되새기게 되는 여러 상황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와 절차는 결코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거듭 확인해가고 있습니다. 이 재판은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국가가 저지른 잘못을 직시하고 피해자 앞에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오늘의 재판이 우리 사회에 보여줘야 할 민주주의의 내용입니다.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죄인의 자식이라는 낙인을 짊어진 채 살아온 유족들에게 오늘 법정의 무죄 선고는 늦었지만 억울함을 덜어내는 길이며, 이 땅의 법과 정의가 여전히 사람들의 존엄을 지키고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 제주다크투어 재판 방청 중 수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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