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서는 안 될 진짜 제주_동재
그동안 몇 차례 제주를 방문했지만, 순례라는 이름으로 제주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주를 찾은 이유는 대부분 관광이었다. 늘 아름다운 풍경과 이국적인 정취를 기대하며 들뜬 마음으로 제주 공항에 내렸었다. 그렇게 설렘을 가득 실은 비행기가 착륙하는 공항 활주로 아래에 지난 역사의 흔적과 상처가 그토록 생생하게 묻혀 있을 거라곤 사실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오랜 세월 동안 하루에 수십 번도 더 오가는 비행기를 그저 허망하게 바라보았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4·3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모든 일이 벌어진 땅 위에서 실제로 죽어간 이름들과 하나하나의 사연을 마주하니, 스스로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얄팍하고 피상적이었는지 깨달았다. 정직히 속을 들여다보면, 한없이 가벼운 연민의 가면 뒤엔 사실 타인에 대한 무심함과 냉담함이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었던 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깨달음은 4·3이 과거에 이미 끝난 사건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생생히 진행 중인 사건이라는 것. 평화공원 한편 끝내 시신을 찾지 못한 이들을 위해 세워진 무수한 비석들 사이에선 그날도 한 유가족들이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주차장에는 계속해서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시신들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유가족의 채혈을 안내하는 현수막이 펄럭였다. 상상 속에서 흐릿한 모습으로 존재했던 피해자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 나타났다.


과거를 가슴 깊이 묻은 채 백 번을 찢어 죽여도 한이 풀리지 않을 그 증오스러운 면상과 그림자를 맞닥뜨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고함을 지르고 저주를 퍼부을 대상마저 잃어 애꿎은 자기 가슴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난도질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지금도 제주 섬 곳곳에 생생한 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해원. 짧은 인생 경험이지만 돌이켜 보면 억울함이란 감정보다 강력하고 파괴적인 감정은 없었다. 억울함은 마음을, 그리고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오늘도 수많은 지옥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넘쳐나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전에는 해본 적 없던 고민 하나가 마음 속에 들어와 깊어졌다.
우리는 평화가 되자_수연

이름 없는 비석(백비)이 누워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기억, 글로 다 담을 수 없는 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세우지 못한 비석만큼 세우지 못한 정의가 남아 있지만, 언젠가는 진실이 곧게 설 것이라는 희망이기도 했다. 일본에 가깝다는 이유로 총알받이가 된 절망의 섬이자, 자치의 열망이 가장 뜨거웠던 희망의 땅. 제주의 이야기다.
7년 7개월. 제주 4·3 이후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무장대 손에 희생된 이는 전체 10%에 불과했고 나머지 90%는 국가폭력에 쓰러졌다. 무장대나 남로당에서 활동하다 학살된 이들은 당시 건국을 거부한 것으로 여겨져 4·3 희생자 명단에 올랐다 나중에 빠졌다. 이름이 지워진 것만큼 더 슬픈 역사가 있을까. 거칠거칠한 흔적을 보는데 울컥했다.

제대로 보아야 한다. 그들은 이념으로 건국을 거부한 게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는 폭력에 맞서려 했던 것이다. 그래야 총살 명령을 거부했던 사람들처럼, 폭력 앞에 기죽지 않고 다른 선택과 판단을 할 수 있고 아픔이 반복되지 않는다. 또 제대로 보아야 할 것은 4·3의 알려지지 않은 가장 큰 가해자가 미군이라는 것이다. 또다시 마음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제주다크투어처럼 진실을 알리려 애쓰는 존재들을 보며, 이제라도 제대로 알았으니 다시 일어나 힘 있게 살아야 할 이유가 선명해졌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_은샘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한강

제주의 빛과 어두움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그렇게 참혹한 역사가 있었다는 걸 누가 알았을까. 학살과 탄압의 공포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해원 되지 못한 아픔과 갈등이 여전히 이 땅에 떠돌고 있었다.
# 그들이 꿈꿨던 세상

삼다도(三多島)이자 삼무도(三無島)라 불렸다는 제주도. 도둑과 거지와 대문이 없다는 이 섬은 좌우(左右)도, 기업가와 노동자도, 지주와 농민도, 여자와 남자의 권리도 차별 없는 세상을 꿈꿨다. 광복 직후 강대국의 이해관계 속에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상황 속에서도 남한만의 단선단정(單選單政)을 거부하고 저항했다. 이 나라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맞이하고자 함이었다.

그들의 염원은 무참히 짓밟혔다. 분열과 분단의 씨앗을 심은 미국과 이승만이 승인한 군인과 경찰, 그보다 더 극악한 서북청년단에 의해 제주는 초토화되었다. 국가폭력에 비하면 미미하나 무고한 희생자 중에는 남로당 무장대에 의한 죽음도 있었다. 군인과 경찰의 가족, 무장대 가족이 대살(代殺) 당하기도, 그에 따른 보복 학살로 이어지기도 했다. 남은 가족과 후손들이 이 섬에서 혈연관계로 엮여 같은 마을에 살기도 한다니 황망하기 그지없는 현실이다.
무장대가 들었던 무기라고 해봐야 죽창(竹槍) 정도였다. 평생 바다에서 물질하고 농사지으며 하루 밥 벌어먹는 민중들이 제대로 된 훈련은 받아봤을까. 아무리 무지하다 한들 이 싸움의 결과가 개죽음이라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앉아서 죽기보다는 서서 맞서 싸우다 죽기를 선택한 민중의 분노가 1980년 5월 고립된 광주 시민들의 결기와도 닮아있다고 생각하니 먹먹해졌다.

마을 단위로 이름이 적힌 수많은 위령비 중에는 이름도 없이 죽어간 생명도 있었다. 이름을 짓기도 전에 죽었거나, 여전히 그때의 공포에 짓눌려 차마 가족의 이름을 말할 수도 없거나, 이름조차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졌거나, 온 가족이 학살되어 이름을 찾을 수 없는 수많은 생명의 비(碑)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 ‘부당하므로 불이행’
이 거센 죽음의 불길 속에서도 제주의 생명이 꺼지지 않도록 지킨 의인들이 있었다. 학살의 광기로부터 무고한 양민들을 보호하려 했던 김익렬 중령, 30만 제주도민을 모두 죽여서라도 진압하겠다는 상관을 암살한 부하들, 동포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며 4·3 사건 진압 출동 명령을 거부한 여수의 군인들, 서슬 퍼런 예비검속 총살집행을 ‘부당하므로 불이행’함으로써 무고한 민중들을 석방한 문형순 성산포 경찰서장.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스러져 간 의인들의 투쟁에 빚지지 않은 생명은 없다. 우리가 이 순례를 멈추지 않을 이유이다.

#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이 중일전쟁의 전초기지로 삼았다는 알뜨르 비행장은 감자와 참깨가 심긴 밭이 넓게 펼쳐진 곳이었다. 지금은 국방부 소유로 활주로 제외하고는 농지로 임차되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한 주전 한국공동체교회협의회 수련회에서 만난 개척자들의 이야기에서 ‘전쟁의 소문이 그칠 때까지’라는 각오와 사명을 들었는데 그때 함께 전해주신 미가서의 말씀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4·3)’가 떠올랐다. 비행장에 스포츠 센터나 사격훈련장 혹은 평화공원을 세우려 한다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더 평화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 그럼에도 훼손되지 않은 삶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담벼락 위에 옹기종기 솟아난 선인장 구경하며 진아영(1914-2004) 할머니 삶터로 갔다. 무명천 할머니라 불리던 진아영 할머니는 제주 4·3사건 때 총상으로 아래턱을 잃으셨다. 말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먹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진 할머니를 보며 친척분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생각하셨다. 친척이 있는 월령리에 홀로 거주하며 무명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다녔던 할머니의 작은 집에는 색이 바랜 벽지와 당신의 손때가 묻은 가구와 집기들이 그대로 있었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 4·3의 아픔과 고통을 고스란히 짊어졌을 할머니에게 이제는 안식과 평화 가득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