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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당 최고위원 일부가 제주4·3의 역사를 폄훼하는 망언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들의 정치적 의도는 일부 극단적인 보수계층의 지지를 얻어 최고위원이 되고, 내년 총선에 후보가 될 기회를 얻고자 함이다. 정치인 개인의 영달을 도구로 역사를 이용하는 것은 매우 저급한 방식이다. 게다가 70년도 전에 발생한 역사, 그리고 10년 전에 국가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가 있어 이를 통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 있는데도, 근거 없는 망언을 일삼는 것은 죄악에 가까운 짓이다.
이런 와중에 4월 24일 워싱턴포스트에 윤대통령은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어떤 일이 절대로 불가능하고, 100년 전 우리의 역사 때문에 용서를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 는 인터뷰 내용을 남겼다.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매우 창피한 수준의 내용이다.
이런 식의 역사관이라면, 과연 4·3의 역사가 앞으로 온전히 기록되고, 기억될 수 있을지 매우 우려스럽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75번째 4월 3일을 맞았다. 그리고 1948년 4월 3일, 왜 제주도민의 무장봉기가 일어났는지 그 시작을 알려주는 제주시 원도심을 찾았다.

3·1절 기념행사 발포사건의 현장, 관덕정
4월 3일 무장봉기가 발생하기 1년 전 즈음인 1947년 3월 1일은 제28주년 3·1절 기념행사가 제주도 곳곳에서 개최되던 날이다. 가장 많게는 3만 명 정도가 북국민학교 운동장과 그 주변에 모여 유명 인사들의 연설을 듣고 함께 구호를 외쳤다. "통일독립 쟁취하자!"는 구호 아래, 이날 기념대회를 주도한 것은 좌익 세력의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이었다. 당시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는 건국의 5가지 원칙은 아래와 같다.

  1. 기업가와 노동자가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2. 지주와 농민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3. 여자의 권리가 남자의 권리가 같이 되는 나라를 세우자
  4. 청년의 힘으로 움직이는 나라를 세우자
  5. 학생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건국 5원칙은 당시 사람들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다. 기념대회를 끝낸 군중들은 각자의 마을과 집으로 돌아가면서 자연스럽게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져나가 소강상태에 이른 와중에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기마병이 길가에 있던 아이를 말발굽으로 치고 갔고, 기마병은 이를 인지하지 못한건지, 아니면 무시한 건지 돌아보지도 않고 길을 계속갔다. 이를 목격한 군중은 기마병을 쫓으며 항의했고, 기마병은 놀라 지금의 관덕정 옆 목관아가 자리인 제주경찰서로 황급히 달려들어 갔다. 이에 경찰서는 기마병을 뒤따라오던 군중을 오해하여 무자비한 발포를 행했다. 이에 무고한 시민 6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들 대부분은 등에 총을 맞은 것으로 밝혀져, 경찰이 도망가는 군중에게 발포한 것이 드러났다.
당시 제주도민은 단순히 이날의 발포사건 하나로 분노한 것이 아니었다. 제주도는 일제강점기 내내 육지보다 가혹한 강제징용 및 징병, 강제 노역을 해야 했다. 그러다 맞이한 해방은 제주도민에게 더욱 많은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남과 북이 나뉘어 다른 미국과 소련이 통치하게 되면서 이 기대는 오히려 절망이 되었다. 군인들이 통치하는 방식은 일제보다도 못했다. 게다가 전염병 유행, 일자리 부족, 식량 부족, 관직의 부정부패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3·1절 발포사건은 도민의 분노를 모아내는 역할을 했다. 이날의 사건은 결국 경찰의 사과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이날 기념대회에 참여했던 도민 500명이 체포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제주 자주독립 움직임의 중심, 칠성통
관덕정 옆 칠성통(칠성로)에는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많은 사람들이 머물던 곳이다. 제주시 우체국 옆 칠성로 입구에는 갑자옥이라는 유명한 모자점이 있었다. 이 상점 사장 이상희는 무장대 총책이었던 김달삼과 친척이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칠성통 큰길가 옆에는 중앙이발소 제주약방이 있었다. 중앙이발소는 민주주의 민족전선 간부들이 모임을 갖던 장소로 주인 김행백은 민전 선전부장이었다. 그 옆 제주약방 주인은 김두봉으로 제주도립병원 약제과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이곳 역시 민전 간부들이 자주 모임을 가졌던 장소다. 김두봉씨는 3·1절 발포사건 이후로 3·10 총파업을 주도하고 이후 입산하였다가 붙잡혀 처형 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칠성통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중간 즈음 건물 2층에 제주신보사가 있었다. 제주신보는 해방이후 제주도의 유일한 언로매체였다. 1948년 4·3 발발 이후 제주읍 내에 살포된 전단지가 제주신보사에서 인쇄된 것이 빌미가 되어 편집국장 김호진이 군수사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다가 1948년 10월 31일경 처형됐다. 1949년 2월경 제주신보사에 난입한 서청단원들이 저항하는 사장과 편집국장 등에게 집단폭행을 가하고 쫓아낸 후 제주신보사를 강제 접수하여 7개월간 변칙 발행했다. 1949년 10월 12 일 당국에 구제를 호소한 김석호 사장이 다시 경영권을 찾았다. 1990년, ‘제주신보’의 일부가 발굴돼 4·3 진상규명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상당 기사들은 그 기록이 사라져 아쉬움이 크다.
칠성통과 중앙로가 만나는 지점에 서북청년회 본부가 있었다. 서북청년회는 월남한 청년들의 조직이다. 1947년 11월 2일 조일구락부(제주극장, 현대극장)에서 서북청년회 제주도본부가 결성되어 위원장에 장동춘, 부위원장에 박병준이 선출되었다. 서북청년회는 1947년 3월 총파업 직후 사퇴한 박경훈 도지사의 후임으로 부임한 유해진 지사를 경호할 목적으로 10여 명이 입도하면서 제주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 후 민간인 신분 혹은 군경토벌대의 신분으로 속속 입도하여 무소불위의 횡포를 부리고 1948년 10월 이후 대규모 희생기에는 대부분 서청이 제1선에 있으면서 학살을 주도적으로 자행했다.
최근 이들의 후예라며 이들이 '서북청년단'의 이름으로 4·3 추도식이 진행되는 4·3 평화공원에 집회신고를 하고 3명 정도가 나타나 4·3 역사의 왜곡시도가 있었다. 어렵사리 용기내어 화해와 상생의 길로 가려는 4·3 희생자와 유족들 앞에 다시 한번 깊은 상처를 남기는 안타까운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중앙사거리에는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있었다. 1945년 9월 10일 결성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중앙정치 지형의 변화에 따라 인민위원회로 변경됐는데 제주도는 건국준비위원회가 1945년 11월 11일, 인민위원회로 간판만 교체된다. 인민위원회는 미군 진주 이전 제주도의 치안공백 등에 자체적으로 대응했고, 일제하 항일운동가들과 지역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미군정 시기 미군정과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전국의 인민위원회에 대한 해산명령이 내려진 상황에서도 제주도인민위원회는 해산하지 않을 만큼 도민들로부터는 유일한 행정기구로 인식되기도 했다. 인민위원회 주도자들은 항일운동을 했던 사회주의 경향의 인물들이어서, 이후 미군정과 대립이 격화되어 4·3의 전개과정에서 인민위원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대거 희생됐다.

이번 투어에서는 9연대 헌병대 옛터, 9연대 정보과 옛터, 제주도립병원 터, 조일구락부 터 까지 돌아봤다. 제주 원도심은 4·3이 전개되는 동안 오히려 4·3의 피해가 가장 적었고, 전 도에서 벌어지는 4·3 학살의 피해를 잘 알지 못했다고 한다. 해서 4·3 역사에 대해 잘 공감하지 못하는 주민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제주 원도심에는 이런 역사적 기록을 찾기 어렵다. 칠성로 내 일부 표지판만 당시 유적지의 위치를 안내하고 있다.
그러나 4·3 발발의 도화선이자, 해방 이후 제주도민의 꿈과 바람의 중심이었던 제주원도심을 이렇게 방치하면 안된다. 하루빨리 제주 원도심의 숨겨진 4·3역사를 알려줄 안내판이 생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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