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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바람이 분다'는 제주다크투어와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 공동주최하여 서울에서 강좌, 제주에서 현장기행이 진행되었습니다.
참가자 이경희 님이 나눠주신 후기는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홈페이지(http://academy.peoplepower21.org/)와, 오마이뉴스(https://bit.ly/2rOyTww)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영화 <지슬>이 개봉했을 때 나는 친구와 제주를 여행하고 있었다. 개봉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여행을 떠나며 우리는 제주에서 <지슬>을 보자고 했다. 마침 일정에 다랑쉬오름이 있어 영화를 제주에서 본다면 여행이 더 의미 있어질 거라고. 그러나 그 일을 실행하지 못했다. 여행 마지막 날, 극장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할 시간에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작은 레스토랑에서 커다란 새우가 들어간 크림 파스타를 먹었다.

그날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여행은 나에게 다른 의미를 남겼다. 제주에 살고 싶어졌고 매해 한두 번 제주여행을 다녀오게 만들었다. 4·3 역사기행을 신청한 것도 제주를 더 알고 싶어서였다. 수업 장소인 참여연대는 집에서 멀지 않았고, 제주로 1박 2일간 답사를 다녀오는 강좌가 4월에 열렸으니까, 가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후기를 쓰기에 앞서 한 가지 고백하자면, 나는 수업을 듣고 제주4·3에 대해 알게 된 후 역사기행을 포기하고 싶었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1947년 3월 1일 3·1절 발포 사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령 해제. 7년 7개월. 희생자 3만 명. 당시 제주 인구의 십 분의 일. 첫 수업 날 노트에 적은 내용이다. 김종민 선생님은 칠판에 연대표를 그리고 당시 기사와 자료, 생존자의 증언을 토대로 4.3의 개요를 짚어 갔다. 얼마나 끔찍한 사건이었는지. 수업 내내 너무 참담해서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었다. 몇 년간 사건이 지속됐고 몇 명이 죽었다는, 노트에 적어둔 숫자도 그랬지만 사람들의 증언 때문에 더 그랬다.

생존자 7000명을 인터뷰하고 진상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던 김종민 선생님에게 듣는 4·3은 '역사'나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였다. 가족이 총에 맞아 죽은 일을 길게 증언하는 할머니와 총 맞아 죽은 게 끔찍한 일도 아닌데 뭘 그리 길게 말하느냐 타박하는 옆에 다른 할머니들. 일곱 살에 토벌대에 의해 집이 불 타 가족을 잃고, 그때 가족을 구하지 못한 일을 평생 자책하며 살아온 할아버지. 다른 어떤 설명보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 한마디에서 떠오르는 그 사람의 삶이 내겐 더 성큼 다가왔다.

4·3평화공원 위령제단에서 참배 하는 역사기행 참가자 ©참여연대

역사기행의 출발은 4·3평화공원이었다. 진상을 알리고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인 만큼 많은 자료와 글을 통해 사건의 참상을 설명하고 있었고, 다랑쉬굴과 제주공항 유해 발굴 현장 등을 재연해 놓기도 했다. 수업을 통해 이미 들은 내용이었지만 다시 보는 일은 수월하지 않았다. 나쁜 일을 두 번 목격하고 겪는 것처럼 더 생생하고 참혹하게 다가왔다. 또 그래서 실감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1만4000여 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위패 봉안실에 들어갈 때는 많다, 너무 많다, 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웅장하리만치 높은 천장까지 빼곡히 찬 위패를 보면서 슬프기보다는 무력감이 밀려왔고, 그건 행방불명자묘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형무소에 사람을 가두고, 죽이고,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시신을 찾을 수 없다. 생사를 확인할 수조차 없다. 한 명이 아니고, 열 명이 아니고, 삼천구백 명. 전국에서 제주 사람 삼천구백여 명이 그렇게 사라졌다. 행방불명자 묘비 사이 기념비석에는 그들이 형무소에서 집으로 보내왔던 편지의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 편지를 받아보신 즉시 답장하여 주시고 종종 편지하여 주십시오', '사랑하는 옥녀야 나는 네 생각만 나고 있다', '매형에게 부탁하였으니 소와 말을 잘 관리하여 주기를 부탁합니다' 글귀 앞에서 나는 그들이 편지를 쓸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들이 죽을 거라는 것을 알았을까, 몰랐을까, 헤아려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서울에서 진행된 수업 말미에 김종민 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다. 많은 사람이 제주로 이주를 꿈꾸고, 제주가 아름답다고 한다. 당시 열 살 소년이 칠십 년이 지나 지금은 여든이 되었다. 가족을 잃은 일고여덟 꼬마가 끈질기게 살아남아 자식을 낳고 폐허가 된 마을을 일으켰다. 아름다운 제주를 만들어냈다. 4·3은 참혹했지만, 그 극복의 역사는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그날 오후 우리가 걸었던 북촌리가 그랬다. 오백여 명의 사람들이 하룻밤사이 학교 운동장에서 사살됐고, 한때는 남자가 없어 무남(無男)촌이라 불리기도 했던 마을. 북촌리 우리가 걷던 길에는 4·3 유적지 표식과 올레길 표식이 함께 걸려 있었다. 때마침 흔치 않게 날씨마저 좋아서, 그 길을 걸으며 마음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었다. 사람들 사이 조금씩 대화가 오갔고, 표정이 밝아졌고, 웃음을 터트리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제주 북촌 4·3길 ©제주다크투어

영화 <지슬>의 촬영지이기도 한 동광리 큰넓궤는 몇 년 전부터 출입이 통제돼 있었고, 허가가 쉽지 않다고 했다. 만약 큰넓궤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나는 4·3을 희생자가 아주 많은 끔찍한 사건으로만 기억했을 것이다. 안내를 맡아준 한상희 제주교육청 4·3담당 장학사는 우리더러 무등이왓 마을 사람들이라고 했다.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을 잃고 큰넓궤에 은신해 지낸 무등이왓 마을 사람의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한상희 장학사는 등장부터 떠들썩했고, 우리에게 역할을 주고 난 뒤에는 이제 토벌대에게 쫓기고 있으니 빨리빨리 움직여라, 우리는 다시 나와서 마을을 재건할 거다, 죽으려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살려고 들어가는 거다, 마을 이장처럼 우리를 이끌었다. 그래서 나는, 아마 모두 그 역할에 충실했던 것 같다. 궤는 입구가 너무 좁아서 시작부터 포기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입구를 지나자마자 통로는 점점 더 좁아져서, 엉금엉금 기어가다 곧 납작 엎드려야 했다. 어두워서 손전등을 비춰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앞을 보려고 고개를 들면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기 일쑤였다. 헬멧을 쓰지 않았다면 머리를 다쳤을지도 모른다. 새어 들어오는 빛조차 없었다.

이유나 원리는 모르겠는데, 한두 사람 뒤에서 혹은 앞에서 불빛을 비춰줄 때가 가장 잘 보였고, 우리는 서로의 빛에 의지해 이동했다. 중간에 내가 우비에 발이 걸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바람에 앞사람과 거리가 생겼다. 뒤에서 불빛을 비춰주어도 앞은 어둡기만 할 뿐 아무것도 없었다. 불빛과 앞사람이 모두 있어야 했다. 통로가 좁아 앞으로 가려고 몸부림을 칠수록 숨이 막혔고, 그렇다고 옆으로 비켜날 수도 없어서 이때가 가장 막막했다.

동광리 큰넓궤. 참가자들이 헬멧을 쓰고 천천히 동굴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김치환

포기하고 싶을 때까지 좁은 통로를 기어가니 다리도 허리도 펼 수 있을 정도로 높고 둥근 공간이 나왔다. 한쪽으로 다시 높은 곳에 이 층처럼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가 무등이왓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눕는 건 물론 앉기도 어려울 정도로 돌은 뾰족했지만 그래도 궤에서 가장 '쾌적한' 공간이었다. 비교적 돌의 크기가 가장 작아 땅이 평평한 편이었고, 다리를 펴고, 똑바로 앉을 수도 있었고,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마주 앉아 대화도 나눌 수도 있었다. 막상 들어와 보니 상상했던 것처럼 끔찍하다거나 무섭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냥 그때,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

"밥은 어떻게 먹었어요?" 누군가 한상희 장학사에게 물었다. 궤 안에서는 불을 피울 수 없어 한 사람이 밖으로 나가 밥을 해 와야 했다. 당번은 진짜 싫겠다, 진짜 무서웠겠다, 생각하는데 한상희 장학사가 말했다. "가족들, 마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얼른 해가지고 빨리 가야겠다, 그랬겠지요." 뜻밖의 말이었다. 그곳에서 잠시 묵념을 했고, 모든 불빛을 껐을 땐 눈앞이 정말 새까맸다. 여기가 굴이라는 것도 사람들이 옆에 있다는 것도 알아챌 수 없고 모든 게 사라질 만큼 까맸다. 거기서는 낮도 밤이었고, 온종일 밤뿐이었다. 밤만 지속되는 궤에서 두 달이나 사람이 살 수 있었던 건, 같이 있던 마을 사람들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 가족만 됐어도 버티기 어려웠을 텐데, 한 마을이, 세 마을이 같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동광리 큰넓궤 안. 손전등을 끄고 어둠과 정적이 흐르는 동굴에서 당시 주민들의 삶을 떠올려보았다 ©김치환
동광리 큰넓궤 안. 손전등을 끄고 어둠과 정적이 흐르는 동굴에서 당시 주민들의 삶을 떠올려보았다 ©김치환

나갈 때는 요령이 생겨서 들어올 때보다 수월했다. 조를 짜서 서로 떨어지지 않게 움직였고, 힘이 들면 같이 쉬었다. 마을 사람들이 밥 기다리고 있는데 이러다가는 전부 굶게 생겼다는 농담도 했다. 기어가는 것도 요령이 생겨서 앞으로만 기지 않고 옆으로도 기었고, 들어갈 때보다 속도가 훨씬 빨랐다. 동굴 입구를 나오면서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처럼 환호했다. 비가 아주 많이 내리는 흐린 날도 아주 밝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우비가 다 찢어지고, 바지도 찢어지고, 신발은 다음날 새로 사야 했을 정도로 더러워졌지만 괜찮았다. 비가 너무 많이 오는 탓에 정작 우리 마을인 무등이왓에는 가지 못했지만, 점심을 먹는 내내 다들 상기된 표정이었다.

섯알오름에 가서야 잊고 있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무등이왓 마을은 불타 전부 없어졌고, 궤 안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무등이왓 사람들이 사살된 곳이 섯알오름은 아니었지만, 나는 사람들이 눈앞에서 사살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차례로 줄을 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죽인다. 총살된 사람들은 웅덩이에 무더기로 떨어져 썩어가고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러 왔을 땐 팔, 다리, 머리, 몸통만 따로 있고 온전한 시신이 없다. 신원을 구분할 수 없어 큰 뼈를 대충 수습해 안장한다.

섯알오름과 백조일손지묘. 우리가 지나온 곳 중 사람이 끔찍하게 죽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죽음이 너무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사람이 살고 있던 곳에 있다 왔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4·3의 모든 죽음이 끔찍하고 참담했지만 삶이 있었다는 걸 알고 난 후 목격하는 죽음은 그 무게가 너무 달랐다. 한상희 장학사는 이동하는 동안에도 4·3 이야기,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 이야기, 살아남은 할머니들 이야기, 마을 이야기,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섯알오름에 다녀온 뒤로는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버스에서 얼른 내리고 싶기만 했다.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해설사는 늘 희생자들의 나이를 눈여겨 보라고 했다. 어린이들도 학살을 피해갈 순 없었다 ©참여연대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해설사는 늘 희생자들의 나이를 눈여겨 보라고 했다. 어린이들도 학살을 피해갈 순 없었다 ©참여연대

백조일손지묘를 끝으로 기행은 끝났고, 나는 사람들과 헤어져 남은 일정의 숙소인 바다 앞 옛집으로 갔다. 아주 피곤해서 방에 들어가자마자 곯아떨어질 줄 알았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슨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 어딘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한 번. 어쩌면 두 번쯤, 낮에 헤어진 사람들을 생각했다. 서울로 잘 돌아갔을까. 제주 숙소에 잘 도착했을까. 자고 있나. 그러나 새벽 네 시가 돼 겨우 잠들 때까지 내가 가장 많이 떠올린 건, 밤이라는 글자와 7000명을 인터뷰한 김종민 선생님과 한상희 장학사였다. 그 분들은 잠이 안 올 때 어떻게 했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아까 한상희 선생님 이야기 귀담아 듣고 많이 웃을 걸 싶기도 했다.

기행을 다녀온 지 보름이 지났다. 누군가 제주에 가 살고 싶으냐고 물으면 이젠 쉽게 대답을 못할 것 같다. 한상희 장학사에게 들었던, 가시리와 신흥리에는 꼭 가볼 생각인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제주 4·3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제주다크투어
제주 4·3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제주다크투어

끝으로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제주기행을 떠나기 전 나는 4·3에 관한 이야기를 써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옛집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우면서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게 뭐냐 하면. 나는 4·3 이야기를 쓰지 않기로 백기까지 들고 손을 떼려는데, 칠십 년 전에 벌어진 일이 그때는 살지도 않고 우리 가족 누구도 겪지 않은 그 일이, 왜 며칠 전 나한테 일어난 일처럼 여겨지는 건지. 왜 나를 휩쓸고 지나가지 않고 계속 나를 휘감고 있는 건지. 이런 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람들과 말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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