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25일(화) 오전 10시,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는 4・3관련 군사재판 수형인 38명에 대한 60차 직권재심 재판(2025재고합12)이 열려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들 중 21명은 1948년 1차 군법회의 관련하여 내란죄 위반으로, 17명은 1949년 군법회의에 의해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전국의 형무소로 보내졌다가 희생되었거나 극적으로 출소해서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차별과 낙인으로 고통받다 돌아가셨다.
7개월 만에 열린 군사재판 직권재심 재판이었다. 이번 재판의 피고인들은 그간 희생자로 신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주4·3희생자유족회의 재심요청에 따라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이하 '합동수행단'으로 표기)’ 장지철 검사가 밝힌 최종 의견을 통해 제주4·3기간 진행되었던 두 차례의 군법회의(군사재판)이 법적 문제점에 대해 지적했다.
정상적 재판이라면 피고인 개인별로 구체적인 범죄 사실, 중거, 피고인의 무죄주장 사유 등을 살펴 유무죄를 판정해야 한다. 또한 죄가 있다면 죄질에 따라 양형을 하여 형량을 정해야 한다. 그러나 4·3 당시 이 같은 절차는 모두 지켜지지 않았음을 검사는 지적했다. 장 검사는 “재판에 필요한 핵심 소송 기록이 현재까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고, 애초에 공소장이나 판결문을 작성했는 조차 의심스럽다”라고 지적했다.
재판은 재판정에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형무소에 가서야 형량을 알려주는 사례도 많았고, 2차 군법회의 기록 중에는 3일간에 345명이 재판을 받으며 모두 무죄를 주장하였는데, 345명 전원에게 사형 선고가 이루어졌던 사례도 있다. 장 검사는 “3일간 345명을 재판하면서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유죄 그리고 사형을 선고한 것은 물리적·시간적으로 정상적인 심리와 판결을 거쳤다고는 도저히 어렵다”라고 밝혔다. 이어서 “두 차례 군법회의는 진압부대인 2연대가 제주도에서 철수하면서 제주농업학교와 주정공장 등에 수용된 민간인들을 일괄 처리하기 위해 법률이 정한 최소한의 절차도 지키지 않았고, 수백 명에 걸치는 민간인들을 졸속 절차로 처리한 것은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다”라고 밝혔다.
망 정원오는 1949년 2차 군법회의를 거쳐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수형하게 된 제주4·3희생자이다. 그의 아들 정00은 미리 적어온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진술했다.
“저는 정원오의 지식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같이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자식들을 데리고 제주도 죽성이라는 곳을 찾아가려고 하였으나 못 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하가리 김영창 씨 댁에 부탁하여 할아버지 댁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일본에서 왔다는 주민의 신고로 아버지는 형무소로 보내졌습니다. 그후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을 데리고 살려고 하였으나 집도 없어서 누군가 광양 하천가에 있는 집은 알려주었고 그곳의 방 한 칸을 얻어 살았습니다.”
망 김남형은 1948년 12월 1차 군법회의를 거쳐 수형하게 된 제주4·3희생자이다. 그의 양자 김00은 메이는 목을 겨우 억누르며 의견진술을 시작했다.
“저는 김남형의 양자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제주4·3 사건 때 돌아가셨고, 큰아버지 밑으로 양자가 되었습니다. 아버님에 대해서는 생전에 어머님을 통해 조금 들어서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큰아버님에 대해서는 행방불명이 됐다는데 자실들도 다 돌아가시고 큰어머니는 병에 들어계신 상태입니다. 다행이도 합동수행단과 변호인이 여러 가지로 수고하셔서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을 굉장히 고맙게 생각합니다.”
망 최병호는 1949년 2차 군법회의를 거쳐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수형하게 된 제주4·3희생자이다. 그의 아들 최00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최동하씨 장남 최00입니다. 저는 현재 대전에서 살고 있고 어제 비행기편으로 제주도에 도착해서 오늘 이렇게 이 법정에 꼭 참관하고 싶어서 참석을 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제주4·3사건의 억울한 피해자이자 유족입니다. 다시는 이땅에 제주4·3사건과 같은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이번 판결을 통해서 분명히 역사의 못을 박아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오늘 이 자리르 통해 아버지의 역울한 누명이 벗겨지고 그 피맺힌 한이 풀리기를 바랍니다.”
이후 노현미 부장판사는 38명의 피고인이자 제주4·3희생자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 그리고 이번 재판의 한 피고인에 대한 안타까운 이야기를 전했다.
“오늘 사건은 특히 생존 가족이 없거나 자녀들마저 이미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않거나 해외 거주 등으로 희생자 신고를 할 수 없었던 희생자분들을 위하여 제주4·3희생자유족회에서 대신 희생자 신고를 하여 올해 4월 희생자 결정을 받으셨던 분들이 많으셨습니다. 유족회와 제주도 4·3지원과 제주도민들의 노력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이후에도 유족분들을 찾아 오늘 이 자리까지 오실 수 있도록 소통해주셨던 분들, 특히 그동안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주셨던 검찰 합동수행단과 국선 변호인님들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희생자 자녀분들께서 무척 고령이신 것을 보면서 더 늦기 전에 재심절차가 이루어져야겠다는 안타까움과 조급함이 더해졌습니다.
오늘 희생자분들 중에는 올해 4월 유명을 달리하신 양이운님이 계십니다. 양이운님은 생전 올해 4월경에 법무부 직권재심함동수행단에서 생존 희생자 재심 청구를 예정하고 있었습니다. 법원 역시 양이운님 사건이 접수되면 신속하게 거주지 인근 법원에서 출장 재판을 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양이운님이 재심 청구 직전인 2025년 4월에 작고하시면서 재심철구는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양이운님은 시위 도중 경찰 발포에 총상을 입은 지인을 치료하여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소년범으로 인천형무소에 1년 정도 구금 후 풀려났고, 이후 6.25에 참전하여 국가유공자가 되셨다고 합니다. 자녀분에 의하면 양이운님은 평소 심리적 두려움으로 제주4·3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꺼렸다고 합니다. 오늘 이 판결이 양이운님과 모든 희생자, 가족분들을 짓눌러 왔던 억울함을 푸는 출발점이 되기질 바랍니다.”
같은 날 오후 3시에는 제주4·3희생자 고(故) 정창림에 대한 일반재판 청구재심 재판(2025재고합4)이 열렸고, 그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고 정창림은 포고 제2호 위반, 법령 제10호 위반으로 총 8건의 범행을 저질렀다는 보았으나 검찰은 그 혐의를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제출하지 못했고,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가 온전히 회복되기를 바란다며 무죄 의견을 제시했다.
그의 변호인인 문성윤 변호사에 따르면, 희생자 정창림은 4·3 당시 고향인 서귀포시 신홍리에서 가족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런데 경찰은 그가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누명을 씌워 1947년 9월 21일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공소사실과 같은 범행을 한 바가 없고, 그를 연행하는 과정, 재판을 받는 과정 모두 적법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결국 어느날 갑자기 남원지서로 끌려가 제주경찰서로 이송되던 중 1948년 음력 4월, 지서 근처 소나무밭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그의 아들 정00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재심을 청구했고, 이날도 재판정을 찾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말문이 막힙니다. 저희 아버지는 남원읍사무소 총무계장을 하셨습니다. 저희 형님과 누나 세분이 태어났습니다. 우리 가족은 4·3으로 7명이나 희생당했습니다. 물론 저보다 더 많은 희생이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우리 가족은 전멸당하다시피 피해를 봤습니다. 현재 우리 형님은 요양원에 계시지만 형의 말에 따르면 3·1절 기념행사 발포사건으로 (도민들이 3·10)파업을 했다는 혐의로 검찰에 송치되어 두 번이나 집행유예로 풀려난 것 같습니다. 3·1절 기념식때까지만 해도 제주도는 아주 평화로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아버지가 총파업에 참여했다는 것은 남원읍 누구도, 저도 금시초문입니다.”
노현미 부장판사는 무죄를 선고하며 “이 사건은 피고인이 반정부 활동을 하였다는 명목으로 유죄형을 선고한 사건으로 피고인이 겪은 고초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피고인이 사건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되었습니다”라고 피고인의 억울함과 애통함을 위로하였다.
부친의 무죄 선고를 들은 그의 아들은 함께 온 가족과 함께 일어나 “민주주의 만세, 만세, 만세!”라고 외치며 재판 결과에 대한 기쁨을 드러냈다.
같은 날 오후 4시에는 10월에 진행된 27차 일반재판 직권재심(2025재고함8)에서 재판에서 제외되었던 제주4·3희생자 고(故) 변우중에 대한 재판이 열렸고,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에게는 총 6건의 혐의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중 5건은 포고 제2호 위반으로 4·3과 관계가 있었으나, 1건이 법령 제5호 위반죄로 1945년 9월 일본군으로부터 절취한 무기를 불법으로 소지한 혐의가 병합된 상태로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검사는 포고 제2호 위반에 따른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구형하였으나 법렵 제5호 위반죄에 대해서는 징역 2월의 선고를 유예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하였다.
문성윤 변호인에 따르면 희생자 故 변우중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해방이 되자 귀국해서 고향인 서귀포시 서귀면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1947년 경찰에 끌려가서 1948년 6월 25일 제주지방심리원에서 이번 재심에서 다뤄진 공소사실에 대한 형을 선고받게 된 것이다. 문 변호인은 총 5건이 해당되는 포고 제2호가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됨을 지적하며 재판부에 무죄 선고를 청하였고, 별개 혐의 1건에 대해서는 대법원의 판례 및 취지에 따라 법원에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충분히 감안하여 판결을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변씨가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후인 1948년 11월 11일 군경 토벌대에 연행되어 끌려가서 재판 절차도 없이 총살 당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노현미 부장판사는 재심에서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재심 판결로서 그 잘못을 바로잡고, 법령 제5호 위반에 대하여는 형의 선고를 유예하기로 하여 판결을 선고유예하는 것으로 판결을 선고하였다.
선고유예란 죄는 있지만 처벌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처벌이다. 예를 들어, 마트에서 초코파이 하나를 훔친 정도의 아주 경미한 범죄 등에 주로 적용되는 판결이다. 희생자는 혐의나 죄질과 무관하게 적법 절차도 없이 토벌대에 끌려가 학살되었다. 그런 그에게 77년 만에 열린 재심재판에서 ‘선고유예’를 구형하고 판결한 사법부의 법적 논리에 동의하고 공감할 사람이 있을까? 애초에 우리나라 사법부가 제주4·3희생자를 재심할 자격이 있는지조차 되짚어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정부와 사법부에 반문하고 싶다. 피고인이자 제주4·3희생자인 故 변우중이 미군정 시기로 추정되는 1945년 9월 불법 무기를 소지한 죄로 77년 만의 재심에서 ‘선고유예’를 판결받아야 할 만큼 법리가 엄격하다면, 77년 전 그를 끌고가 학살한 ‘군경토벌대’는 왜 죄를 묻지 않는 것인가? 국가 공권력으로 제주도민을 학살한 정부와 당시 정부 책임자는 왜 처벌하지 않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