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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행은 제주에서 나고 자란 배우이자 시인이신 김경훈 선생님의 안내와 함께 시작되었다.

제주에 산 지 제법 되고나니 제주를 좀 더 깊이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흔한 관광코스가 아닌 진짜 제주의 이야기가 녹아든 곳들이 궁금했고, 제주가 들려주는 솔직한 옛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김경훈 시인과 함께 조천읍 곳곳의 제주4·3 유적지를 찾아다녔습니다
김경훈 시인과 함께 조천읍 곳곳의 제주4·3 유적지를 찾아다녔습니다

첫 기행지인 조천중학원 옛터는 4·3 발발 전, 고문치사 사건으로 사망한 김용철 학생이 다니던 학교다. 도로 너머 맞은편에는 김용철 학생이 고문받다 사망한 조천파출소(당시 조천지서)가 있다. 김용철 학생은 4·3 발발 1년 전인 1947년 3·1절 시위에 나갔던 학생위원장이라는 이유로 조천지서에 연행되어 조사받던 중 고문치사를 당했다. 이는 제주에서 일어난 첫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제주에 부임한 지방관의 공덕비가 일렬로 늘어선 조천리 비석거리를 지나면, 4·3 당시의 집단 수용소였던 파란 건물이 보인다. 조천리로 피난 왔다 붙잡힌 후 여기에 수용되어 있던 수백명의 가족들이 차례차례 불려나가 조천지서 앞 밭에서 집단으로 총살당했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잘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의 끔찍한 폭력이다.

조천파출소 앞에 보수단체가 세운 제주4·3 표지석을 읽어보았습니다.
조천파출소 앞에 보수단체가 세운 제주4·3 표지석을 읽어보았습니다.

4·3 당시 사람들이 숨어살던 와흘굴은 와흘리 중심에 위치해 4·3 당시 마을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피신했던 곳이다. 밖에서 보기엔 사람 대여섯이 들어갈까말까해 보이는 작은 동굴로 보이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굴이라고 한다. 여기 숨어서 하루하루 내일은 살 수 있을까, 오늘은 넘길 수 있을까 두려움에 떨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국가권력이 얼마나 사람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남매상봉기념비 제단 위에 준비해 가져간 술과 음식을 올리고, 들꽃을 꺾어다 올렸습니다.
남매상봉기념비 제단 위에 준비해 가져간 술과 음식을 올리고, 들꽃을 꺾어다 올렸습니다.

서로를 다시는 못볼 줄 알았다가 어렵게 재회한 남매상봉기념비도 감동적이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큰외삼촌은 모두 4·3 때 돌아가시고 북으로 간 작은외삼촌을 만나러 이산가족상봉신청을 한 어머니는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작은오빠를 만나게 됐다. 손자는 작은아들이 죽었을 것으로만 생각했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려 남매상봉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백흥 기념비를 찾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백흥 기념비를 찾았습니다.

마지막 기행지였던 한백흥 기념비는 함덕해수욕장 근처에 있었다. 1948년 12월 1일, 토벌대는 함덕주민들을 모래밭에 집결시킨 후 청년들을 끌어내 무장대 협조자라며 처형하려고 했는데, 이때 마을 이장이었던 한백흥과 마을 유지였던 송정옥이 나서서 청년들의 신원을 보증할테니 자신들에게 맡겨 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토벌대는 결국 마을의 두 원로를 포함해 청년들을 모두 학살하고 만다.

마을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나섰음에도 결국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던 무고한 의인들, 무고한 사람들. 그들의 잃어버린 인생을 어떻게, 누가 보상해줄 수 있을까. 그것을 이렇게 기념비로나마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다면 그 한을 도대체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와흘굴로 가는 길에 동백꽃이 피었습니다.
와흘굴로 가는 길에 동백꽃이 피었습니다.

4·3은 잊혀져선 안 된다. 기행을 떠나기 전 내게 조천은 그저 ‘제주공항 근처, 함덕해수욕장이 있는 곳‘ 이었다. 그러나 함덕해수욕장의 푸른빛 바다에 감춰진 심연을 알아갈수록 더 이상 바다가 마냥 푸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제주는 겉으로는 평온해도, 그 안에는 핏빛 마그마가 들끓고 있는 화산같은 섬이었다.

제주에서 국가권력에 무고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이 흘린 피, 그 희생을 잊지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그들의 잃어버린 꿈과 미래를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가장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기억‘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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