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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은 말한다> 강독모임에 함께 하고 있는 오수진 님이 강독모임에 참가한 소감을 보내오셨습니다.
4·3을 통해 우리 자신을 알아가는 중입니다
4·3을 통해 우리 자신을 알아가는 중입니다

‘아… 아무래도 안되겠다. 오늘 못 간다고 해야지’

밤새 <4.3은 말한다> 스터디 발제를 준비하다 보니 어슴푸레 새벽이 밝았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이 상태로 발제를 갈 순 없어. 그럼, 그렇고말고. 생각해보니 어디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진짜 아프다. 마음이… 나름 그래도 열심히 읽고 검색해보고 질문거리를 찾았는데 어쩜 이렇게 새하얗게 모를 수 있지? 분명 저 두껍디두꺼운 책을 읽었는데 말이다. 무방비 상태로 수능을 치는 악몽의 한가운데가 여기일까. 이건 사실일 리 없다. 누구라도 나에게 발제는 다 뻥이고 이렇게 어려운 스터디를 니 손으로 들어갔을 리 없다고 말해줘(제발...)

야속하게도 어김없이 화요일 오후 7시는 돌아왔고 우리는 어느 조그만 책방에 모여앉았다. 수면 부족으로 오는 몽롱함 때문인지 아님 모자람에서 나오는 용기인지 이젠 슬슬 웃음이 새어 나온다. ‘허허허… 나 왜 여기에 있지? 우리 스터디 분들은 왜 여기에 계실까?’라는 존재론적 의문은 이 스터디의 목적과도 일맥상통한다. 2020년의 우리는 왜 70여 년 전 제주 4.3을 공부하게 되었을까?

“왜 제주만 4.3항쟁이 벌어졌을까요?”

라는 질문에 순간 공간이 잠시 정지했고 우린 모두 4.3의 발단이 되었던 1947년 3월 1일의 그날을 상상해보았다. 4.3 이전의 제주는 물이 끓기 전 99도와 100도 사이 어디쯤이었으리라. 지난한 일제를 청산하고 새 시대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가득하던 시절, 이제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다짐이 피어오르던 때. 나 그리고 2016년 겨울 광장의 많은 사람들도 광화문 그리고 제주시청에서 촛불을 들어 봤으니 아마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도 이제는 좀 잘 살아보자!’라는 외침은 특정 집단의 정치쇼가 아닌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욕망이란 걸 우린 이미 배워 알고 있지 않은가.

미군정의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자주독립을 꿈꿨던 사람들은 비단 제주뿐만이 아니었다. <4.3은 말한다>에 따르면 제주, 서울, 부산, 정읍, 순천, 영암 등의 도시에서 1947년 3월 1일 시위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 오로지 제주만 이후 강압적인 탄압으로 말미암아 1948년 제주 4.3항쟁으로 불길이 타올다. 아직 일제 청산도 안되고 이념도 불분명하던 시대에 왜 그리 제주를 몰아세웠는지를 알 수 있다면, 70년이 넘은 이 긴 세월을 누가 사과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조사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이다.

“엄마, 우리 집엔 4.3 피해자가 없어서 다행이지?”

몇 해 전 영화 <지슬>의 선댄스 수상 소식을 엄마에게 전하며 말을 덧붙었었다. 우린 다행이다 그치? 엄마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 “왜 없느니 게. 우리 외할머니가 4.3 유족이잖아.”라고 말해주셨다. 평생 처음 들어보는 4.3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 4.3에 가족을 다 잃고 홀로 살아남은 외할머니가 살면서 어떤 불안에 시달렸는지 그리고 그 불안감에 주변 가족들은 어떻게 지쳐갔는지에 대해서. 정말 영화 같던 그 순간 내 인생에 어떤 부분이 크게 흔들렸다. 유년 시절 우리 집 삼 남매는 거의 외할머니 댁에 살다시피 했고 부모님께 혼이 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피난처였건만 나는 그 순간까지도 가족의 역사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딱히 궁금해하지도 않으며 그녀가 주는 사랑의 달콤함만을 누려왔으니 그건 일종의 편의주의였으며 방관이었으리라.

그래서 나는 뒤늦게나마 돌아가신 할머니의 삶을 이해하고 싶어 4.3을 공부한다.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나로 내려오는 이 ‘장녀의 연대기’ 속 후천적 불안을 이해하고 싶어 4.3을 공부한다. 자주 불안에 떠는 나조차도 사랑해 주고 싶어서 4.3을 공부한다.

아마 우리 스터디원들도 각자의 이유로 4.3을 공부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4.3을 알고 싶은 이유는 찾다 보면 끝이 없다. 얼마 전, 집안에 4.3 피해자가 없어서 공감이 잘 안 간다던 친구는 내가 빌려준 책 <제주4.3을 묻는 너에게>에서 할아버지의 증언을 발견했다. 조사원들에게는 말해도 차마 가족들에게는 밝힐 수 없는 것이 제주4.3이다. 제주의 선주민과 이주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 또한 4.3이다. 거대한 폭력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어떻게 지금도 그 가혹함이 형태만 달라져 ‘n번방’ 이 되는지의 맥락을 알기 위해 우리는 4.3을 공부한다.

앞서 말한 우리의 교재 <4.3은 말한다>는 빽빽이 글자로 가득 찬 두꺼운 책이지만 희한하게도 읽다 보면 비어있는 곳이 많다. 아쉽게도 당시 기록이 많이 안 남아있고 미군정의 자료도 더 찾아내야 한다고 한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지만 한 걸음으로도 천리의 효과를 얻고 싶은, 다소 성질 급한 나로서는 미국이 속 시원히 자료를 딱 공개해 주었으면 좋으련만(저기… 어떻게 안될까요?) 지금으로서는 방도가 없으니 우리 스터디원들과 빈칸의 조각을 맞추는 수밖에 없다.

잘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태도와 행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나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제주 4.3 속 찾아야 할 빈틈을 놓치지 않으며 더 알고자 공부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 수 있을까. 나와 스터디원들은 온 마음으로 이 책을 다 읽고 이후에도 꾸준히 탐구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 사랑은 그리 쉽게 멈출 수 없기에 매주 가깝게 앉아 간식과 마음을 나누며 4.3을 공부하는 우리는 사랑을 알아가는 중이다. 따뜻한 봄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 사랑의 물결에 함께하시길 권유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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