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0일(화)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는 4⋅3 관련 일반재판 수형인 40명에 대한 직권재심 재판이 열렸고, 또한 일반재판 수형인 1명에 대한 청구재심 재판이 열려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약식 기소 벌금형이거나 3년 이하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후 군인이나 경찰에 끌려가 총살당하거나, 육지 형무소로 보내진 후 행방불명되어 아직도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
2월 10일 오전 10시,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노현미 부장판사)는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일반재판 수형인 20명에 대한 직권재심 재판(2025재고합14)을 진행했고, 20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故 고창선은 1948년 당시 26세로 한림면 수원리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런데 그는 1948년 5월 하순경 불온조직에 가입하고, 한림중학교 인민대회에서 경찰에 대한 증오심을 조장하는 발언을 외쳤다는 등의 포고 제2호 위반 혐의로 벌금 2천 원에 처하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후 1948년 11월 18일 서북청년단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 의해 연행되어 수원국민학교 부근 밭에서 총살되었다. 그의 딸 고00은 다음과 같은 진술을 남겼다. .
저는요. 지금 46년생, 80세입니다. 제가 3살이고, 아버지가 27세인가에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남동생을 낳았을 때이기 때문에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에 대해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들은 바로는, 집에 있으니까 경찰이 나오라고 서북청년회인지 총을 가진 사람들이 와서 (아버지를) 나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피하려고 하니까 총으로 현장에서 아버지를 쏴버렸다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3대 독자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모도 없고, 작은아버지, 큰아버지도 없이 아무도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태어난 지 40여 일 된 남동생과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남동생이 7살 되던 해에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는 딸 하나 믿고 못 산다고 하여 육지로 나가버렸습니다. 물론 개가하면서 저를 데리고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저를 안 보냈을 것입니다. 그만큼 조부모님께 정말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때부터는 할머니, 할아버지, 세 식구가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조부모님, 부모님의 기일을 제가 모시고 있습니다. 매년 4월 3일에 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을 찾아 아버지 위패 앞에 음료수라도 한 잔 올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머니도 다른 집으로 개가를 갔지만 마흔두 살에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이모들이 살기 힘들어 서울의 어머니 시신을 제주로 수습해오지 못하고 화장해 뚝섬에 뿌려버렸답니다. 아버지 시신은 어머니 친정 근처인 사라봉 밑에 묻었다는데, 지금 가보니까 무덤 자리가 다 집터가 되어있어 아버지는 무덤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스물두 살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여 혼인신고를 하려고 보니 내가 남편 호적으로 가면서 아버지가 있던 호적이 아예 없어졌다고 합니다.
고생도 너무 많이 했고, 공부도 많이 못했습니다. 그래서 눈물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4·3이라고 하면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우리 아버지가 무슨 나쁜 죄를 지어 어떤 사람한테 총을 맞았습니까? 경찰관인지, 서북청년단인지 와서 쏴버렸다고 하는데, 저는 당시 세 살이었느니 무엇을 알았겠습니까? 아무 근거 없이 그렇게 억울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제주다크투어, 재판 방청 중 수기 기록
故 이남호는 1947년 중문면 중문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중 불온 문서를 농민들에게 선전하는 등 공중치안을 교란하였다는 포고 제2호 위반죄로 벌금 1천 원에 처하는 약식 명령을 받았다. 1948년 당시 47세인 그는 11월 초 중문지서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고 나갔다가 11월 5일 신사터(현 중문성당)에서 중문지서 경찰관에 의해 집단총살되었다. 그의 며느리는 아들을 대신해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겪어야 했던 가족의 아픔을 전했다.
시아버지는 중문에서 어렵지 않게 사시다가 4·3에 총살되고 나서는 저희 시어머님이 그 고통으로 너무 힘들게 사시다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시댁은 (중문)지서 뒤에 있는 3채였다고 합니다. 산사람들이 지서를 습격하는 과정에서 저희 (시댁)집이 다 불탔습니다. 시어머니는 어린 삼 남매를 데리고 살면서, 빌려준 땅의 세를 받으러 가면 '빨갱이 자식들 다 죽게 하겠다. 어딜 땅세를 받으러 왔느냐'라고 해서 땅세도 못 받고, 본인이 육지 분이라 땅도 빌리지 못했습니다. 삼 남매를 살리기 위서 오일 시장에서 국수장사 하시면서 근근이 자녀들 초등학교 정도만 가르치면서 사셨습니다. 그 한으로 저희 시어머님은 살아있는 동안 눈도 잘 안 보이고 고통받다 돌아가셨습니다.
남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군 사관학교나 공무원 시험을 치러 가면 연좌제로 떨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근근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4·3희생자 가족 모임이 창설될 때 그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중문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당시에는 4·3관련 보조금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자비로 중문에서 7, 8명이 모이고, 도에 모여 회의할 때도 자비로 자리를 하면서 정말로 힘들게 살았습니다. 땅도 다시 찾으려니까 자기네가 샀다고 하니-저희는 아는 게 없어서-근거도 없이 다 팔았더랍니다. 정말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닌 것으로 살아왔습니다.
시아버님은 일제강점기에 제주독립운동사에도 나와 있어요. 그래서 독립유공자 보상을 받으려니 4·3때 처벌기록 때문에 보상도 탈락하였습니다. 저희들 정말 어렵게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그나마 무죄라도 선고해주시면, 한을 풀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제주다크투어, 재판 방청 중 수기 기록
이번 재판의 피고인을 변호한 박희석 변호사는 "피고인들은 강제로 연행되어 재판을 받았고, 이후에는 예비 구속되어 총살되거나 전쟁 중에 행방불명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도 고문 후유증을 앓다가 돌아가셨습니다.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은 범죄에 대한 증명이 없으므로 억울하게 희생된 피고인들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해주시기 바랍니다"라며 최종의견을 밝혔다.
같은 날 오후 2시,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노현미 부장판사)는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일반재판 수형인 20명에 대한 직권재심 재판(2025재고합16)을 진행했고, 20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故 김두창은 1948년 자택에서 무장대에 금품을 제공하고, 시위행령을 감행하여 법령 제19호를 위반한 혐의로 1949년 징역 1년6월 형이 선고되었다. 한편 김씨는 1948년 경찰에 연행되어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1949년 9월 14일 탈옥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딸 김00은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는) 3살 때라 어머니 말씀을 들어보면, (아버지가 잡혀가고) 어머니가 밭에서 일하는데, 무조건 잡아갔다고 합니다. 어디서 잡아갔는지도 하나도 모르고. 그냥 딱 갇혀서 구둣발로, 총대가리로 막 그냥 어머니를 때렸다고 합니다. 뼈가 꺾어질 때, 발로 차거나 해도 정신을 잃어 때리는 줄도, 맞는 줄도 몰랐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때려도 좋고, 뼈가 꺾어져도 좋은데, 너무 배가 고파 아무 생각도 안 났다고 합니다. 무엇이든 먹을 것을 주면 살 것 같다고 합니다. 근데 거기서 누가 감자 빼떼기 말린 걸 가진 사람이 있었나 봐요. 그걸 나눠서 먹으니 그때는 사람도 보이고, 조금 정신 나고. 하도 배고프니까 때리면 정신이 나간 채 끌려와 가만히 누워 있으면 주변에서 끌고 들어왔다고 해요.
어머니는 제가 3살에 (잡혀)갔는데, 돌아왔다고 해서 가보니 (몸이 부어) 우리 엄마 아닌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와 나랑 살았는데, 어머니가 일을 도무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다른 어머니들은 옛날에 억새도 비어다가 팔고, 산에 가서 나무 해다가 팔고, 해서 돈을 벌고 하는데. 우리 어머니는 아무 일도 못했어요. 지금은 교회라고 하지만, 그때는 오직 예배당에 가셔서 -몸이 아프니까- 하루 종일 기도만 하다 집에 와서 할머니가 해주는 밥만 먹고 가만히 있으셨어요. 나는 너무 너무 어머니 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집에 안 살았어요. 어머니 하는 것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요. 어쩌다 명절 때만 한번 집에 (갔어요). 제주도는 공장 같은 것이 (많이) 없어서 거의 다 노가다식으로 여러 공장들을 돌아다니며 안 해 본 것이 없이 돈을 벌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불쌍하니까 그 돈을 어머니를 들였어요. 그렇게 하면서 살았는데, 어머니도 오래 못 살았습니다. 나중에 어머니도 아파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옆(집)에 어머니가 나를 보고 '얘야, 어머니 얼굴 한 번 봐라' 해서 봤더니, 하도 맞은 피가 많이 맺혀있었어요, 돌아가셔서 몸을 닦아드리며 보니 몸이 새까맣게 변해있었어요. 이빨만 하얗고, 온 몸이 그냥 완전히 새카맣게 변했어요.
우리 옆(집)에 할머니가 '너는 어머니가 일을 안 한다며 어머니가 미워했지만, 어머니를 보니까 얼만큼 맞아서 피가 몸에 이렇게 고였나' 하셨어요. 그래서 처음 어머니가 잡혀갔다 어떻게 돌아왔을 지는 모르지만, 보니까 (어머니가 송장같이) 갈빗대가 너무 많이 꺾이고 부러져서 숨을 반씩밖에 못 쉬었다고 합니다. 숨을 길게 못 쉬었대요. 동네 사람들이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하니 그때서야 숨을 쉬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4·3사건 이라고 하면 아버지보다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납니다. 어떻게 어머니께 미안한지. 그래서 시집가서 악착 같이 벌어서 지금은 잘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고생한 것은 잘 모릅니다. 보리가 익어갈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이제 무죄 판결을 받았으니까 이번 보리밭은 먹으러 갈 수 있겠다'라는 엽서가 왔다는 말은 어릴 때 들은 적이 있습니다.제주다크투어, 재판 방청 중 수기 기록
이어서 김씨의 며느리도 첨언하였다.
내가 시집을 오니 시어머니가 '이것이 너희 시아버지가 목포형무소에서 보낸 것이다'라며 엽서를 보여주셨어요. 그걸 읽어보니 '고생하는 당신, 이제 걱정하지 말고, 이제 재판 끝났으니까. 얼마 지나면 집에 돌아갈 수 있으니. 노부모님 모시고 살고 있으라'라고 엽서를 써서 보냈더라구요. 그 후에 얼마 지나서 6.25가 터졌는지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아파서 아무것도 못 하셨는데, 아파도 그때는 어려우니까 병원에 갈 수 있습니까. 돈이 없으니 당시에는 이웃집에 침이나 맞으며 살았지요. 시어머니는 쌀밥도 제대로 못 드셔보고 돌아가셨습니다.제주다크투어, 재판 방청 중 수기 기록
故 백경훈은 1949년 포고 제2호 위반죄로 벌금 5천 원에 처한 약식 명령을 받았다. 그의 공소 요지는 1948년 10월 민애청에 가입하였고, 제주농업학교 교우들에게 백지날인을 받도록 지령했다는 혐의였다. 결국 그는 벌금 처벌과 별개로 제주농업학교 재학 중에 연행되어 소식이 두절되었다가 1949년 4월 경 별도봉 굴 속에서 처형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의 조카 백00은 그의 가족이 4·3으로 겪은 많은 피해와 희생에 대해 진술했다.
제가 작년 10월에 재심재판에 참석하고 지금 두 번째 참석하는데요. 참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큰아버지는) 약식 기소로 재판이 이루어졌는데, 그 당시로 계산을 한다라고 하면 굉장히 무거운 벌금입니다. 왜냐하면 저희 아버지나 할아버지한테서 들었던 얘기가 칠성통에 집을 한 채 살 수 있는 돈이 30원이었어요. 벌금이 3천 원만 돼도 백 배가 되잖아요. 집을 몇 채를 살 수 있는 그 벌금을 낼 능력이 되지는 않았었잖아요. 저희 큰아버지는 즉결처분이라는 얘기인데, 저희 큰아버지 같은 경우도 농업학교를 다니시다가 즉결처분을 한 것이에요. 그런데 이유를 몰라요. 한밤중에 군인들이 들어와서 (큰아버지를) 잡아갔습니다. 별도봉에서 시신이 발견되었구요.
그런데 저는 외가, 친가 합쳤을 때 열 분이 돌아가셨어요. 굉장히 기가 막히는데. 과연 그게 정당한 건지. 만약에 약식 기소를 했다면 재판을 받고 된 것이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이루어진 게 아니고 전부 다 처형이 된 거잖아요. 그래서 그게 참 궁금한 점입니다. 기소를 했으며, 벌금으로 끝나지 않고, 군인지, 경찰에 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왜 처형이 됐고, 저희 할아버지 같은 경우는 행방불명이 됐구요. 아버지도 그게 한이 되어 재작년에 돌아가셨거든요. 큰고모는 치매로 전혀 기억하지 못하세요.제주다크투어, 재판 방청 중 수기 기록
이에 노현미 부장판사는 "사례가 너무나 다 다양하고 참 기가 막혀서 제가 다 일률적으로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간혹 이제 목격자 분들이 있었던 사건의 경우에는 재판받는 것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이후의 과정에서 아마 전쟁이 나거나 하는 과정에서 검속을 당해서 무관하게 총살을, 적법한 절차 없이 받은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저희들은 기록을 통해서 그렇게 한, 두건을 전해 들었고. 오늘 사건의 경우에도 상당수 희생자분들이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그와 무관하게. 참 재판장으로서도 참혹하게, 오히려 여러 가지 고초를 겪을 셨고 희생 당하시는 분이 더 많으셔서 그 과정까지는 저희도 진상을 안다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제가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라며 유족에게 답변했다.
같은 날 오후 4시,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노현미 부장판사)는 제주4·3희생자인 고 신두원의 아들 신권섭이 청구한 재심 재판(2025재고합16)을 진행했고, 고 신두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故 신두원은 외도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1947년 포고 제2호 및 법령 제19호 위반죄로 벌금 3천 원에 처했다. 검사가 밝힌 당시 공소 요지에 따르면, 신씨는 3월 1일 제주 외도리부터 제주읍까지 청년들과 시위에 참가하고, 3월 10일에는 외도리 공회당에서 30명과 무허가집회를 하여 3.1절 발포사건 관련하여 경찰에 대한 요구 조건을 결의하였다는 내용이다. 1950년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때는 신씨가 남로당의 평당원으로 가입했고, 무장대에 금품 등을 제공하는 등 협조하였다는 혐의였다.
임재성 변호사는 최종 진술에서 신지섭씨가 아버지 고 신두원을 2000년에 4·3희생자로 신고할 당시의 내용을 밝혔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다가 양민증을 받으러 오지 않는 자는 모두 잡으러 온다. 그래서 죽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1948년 12월 8일 가족을 데리고 산으로 도피했다. 6개월 동안 숨어서 살다가 먹을 것도 없고 잡히면 다시 죽을까 봐 스스로 파출소로 자수하였는데, 그 이후 아버지는 고문받고 취조를 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후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제주다크투어, 재판 방청 중 수기 기록
임재성 변호사는 신지섭씨가 이번 재심을 통해서 아버지가 어떤 판결을 받으셨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며, 기록상으로는 1947년 7월 재심 대상 판결이 확정됐고, 이후에 형이 확정된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 그 이후에 이 사건 피고인이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하셨는지 지금까지도 듣지 못하는 상황임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두 자녀가 노인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서 오늘 재판정에 선만큼 청구인들을 위로할 수 있는 판결이 선고되길 바란다며 진술을 마쳤다.
故 신두원의 딸 신00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작은고모와 작은고모 할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저는 출산해서 3일 만에 동네 사람들이 다 산들에 올라가라고 하니까. 우리 고모할머니가 애기 구덕에 나를 지고, 우리 어머니는 출산 3일 만에 지팡이를 짚으면서 올라가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또 아래로 내려가라고 하면 우리 어머니는 출산한 몸으로 아래로 내려오고 하다 보니까 결국 병이 났습니다. 저는 어머니 젓도 빨아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 상태로 바람을 맞아서 3년 살아도 저에게 젓 한 번 못 먹였습니다.
우리 성할머니(친할머니)는 너무 일이 많아서 어머니가 힘들게 날 업어서 외할머니네 집에 가니까, 옛날에는 차도 없었습니다. 외도에서 애월까지. 외할머니는 오다가 나무 사이나 돌 틈에 그 애기를 버리고 오지 그걸 데리고 왔다고 우리 어머니한테 그렇게 얘기했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외할머니는 모인 좁쌀을 사다가, 얻어다가 막 끌이고 채에 걸러서 그거를 먹여서 나를 살렸답니다.
오빠는 호강 받으며 잘 컸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머니가 나를 낳고 맨날 아팠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3월에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6월이 제사합니다. 어릴 때 (아버지를) 보지도 못했지만, 내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도 한 번도 못 해보고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그래도 외할머니가 저를 키워줘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많이 배우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를 보내도 제가 하도 먹질 못해서 작았어요. 제일 작고 밥이라도 조금 먹으면 설사를 하고 1년에 학교를 50일, 100일도 못 다닐 정도로 아팠으니까요. 겨우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고생하는 것도 좋으니, 평생에 한 번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러봤으면, 손이라도 잡아봤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이 한을 어떻게 풉니까? 우리 아버지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자식들이 다 이렇게 피눈물 흘리면서 살게 합니까?제주다크투어, 재판 방청 중 수기 기록
이어서 故 신두원의 아들 신지섭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는 연좌제 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공부할 의욕이 안 생겼습니다. 대학도 가고 싶었으나 연좌제 때문에. 선생님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연좌제에 걸려서 못한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그냥 살아왔습니다.제주다크투어, 재판 방청 중 수기 기록
이날 세 번의 재판을 연달아 진행한 노현미 부장판사가 제주4·3특별재판부를 떠나 전근을 앞두고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겼다.
지난 1년 간 생존 수형인 재판을 비롯한 여러 재판을 통해서 제주4·3 사건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참혹한 사건이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목도하면서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으로 재판에 임해왔습니다. 생존 희생자분은 16살에 꽃다운 소년에서 90세의 노인이 되어서야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추석 명절에 재심 판결문이라도 차례에 올려 희생자의 억울함을 위로하고자 한다는 유족분의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한 분 한 분의 억울함이 얼마일지 가늠하기 어렵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데 너무나 긴 시간이 흘러서 원통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사건 역시 대다수 피고인들이 벌금형이 선고되었지만 많은 희생자분들이 행방불명되거나 목숨을 잃기도 하여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부디 오늘 이 판결의 선고가 그동안의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고 희생자분들과 유족분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제주다크투어, 재판 방청 중 수기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