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8일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는 4・3 관련 일반재판 수형인 총 60명에 대해 21차, 22차, 24차 직권재심 재판을 열어 무죄를 선고하였다.


오전 10시에 열린 제21차 일반재판 직권재심(2024재고합36)에서 최낙균 변호사가 망인이 된 20명의 피고인을 대신해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그동안의 재판 기록과 과거 행적으로 보건데, 어렵게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던 분들도 상상할 수 없는 고통 겪었을 것이고, 돌아오지 못한 분들도 엄청난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살아 돌아오더라도 감시와 편견에 고통받다 돌아가셨을 것이다. 오늘 재판을 받는 20명은 이 자리에 없지만, 뒤늦게나마 명예 회복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피고인이지만 4·3특별법 상으로는 희생자인 스무 분에게 위로가 있기를 간곡히 바란다. 앞으로는 다시는 이런 국가의 과오가 없기를 희망하고, 미래를 위한 큰 한 걸음이 되길 바란다.”
망 문00은 1949년 6월 10일 제주지방법원에서 법령 제10호 위반죄로 징역2년, 진햅유예 3년, 벌금 1만원을 선고받았다. 기록에 남아있는 그의 혐의는 무장대에게 식량과 자금을 제공하고, 지하선거에 날인한 것 등이나, 이날 재판에서도 밝혀졌듯이 이러한 혐의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의 아들 문00은 이날 재판정을 찾아 “오늘 재판을 통해 잘 아는 기회가 되었다.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무죄선고가 날것으로 예상 하지만, 오늘 재판에서 언급된 공소내용이 여러 가지 안 맞는 내용이 너무 많다. 아버지는 공직에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셨다. 무장대에 자금과 식량을 제공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양식이 떨어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양식을 가져다주는데, 그것을 가지고 상상 못 할 고문을 받으셨다고 했다. 어쩌다 술 한잔 마시면 그 고통을 말씀하셨다고 한다. 징역 2년이 나와서 공직에 해임되었고, 이로 인해 당시 삶이 어려웠다. 만약 이런 죄가 없었다면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잘 했을 것이다. 벌금도 물었다. 만약 무죄가 난다면 이 부분도 보상도 해줘야 한다. 금액의 가치를 떠나서 국가가 개인의 재산을 갈취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절차를 밟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망 김00은 1949년 11월 9일,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방조죄, 법령 19호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울 선고받았다. 그는 1948년 6월경 남로당 가입 및 당비 납부, 무장대에 군자금 제공, 시위행렬 감행 등의 공소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날 재심재판에서 검사는 이러한 공소사실을 증명할 증거가 없다고 밝히며, 그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의 아들 김00은 판사가 발언 기회를 주자, “여기 와서 처음 아버지 죄를 들었다. 그러한 상황이 있다는 것은 알고는 있었다. 저도 공직생활을 30년 해왔다. 오늘 검사님이 무죄추정을 해주셨기 때문에 좋은 결말을 판사님을 주시면 아버지 묘소에 그 결과를 들고 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다. 좋은 판결을 바란다. 4.3이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관계가 있다. 당시에 5시까지 법원 있는 동네로 내려오라고 했는데, 할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아 늦게 오게 되었고, 아라동으로 도망가다 잡혀 사살되었다. 할아버지는 시계를 보지 못해 총살된 것이다. 5시라는 게, 지금은 휴대폰도 있지만, 당시는 5시를 몰랐다. 이제라도 유족회장을 비롯해 이런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데 있어서 상당히 좋게 생각하고 좋은 판결 부탁한다”라고 발언을 마쳤다.

같은 날 오후 2시에는 22차 일반재판 직권재심(2025재고합1)이 열렸고, 20명의 제주4·3 수형인 희생자들이 무죄판결을 받았다.
변호를 맡은 문성윤 변호인은 “이 사건의 피고인들은 당시에 농사를 짓거나 자기 생업에 종사하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피고인들은 당시 군경에 의한 영장도 없이 연행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집행유예 판결을 선고받은 피고인들도 있지만, 실형을 선고받은 피고인들도 일부 있다. 실형을 선고받은 피고인 중에는 육지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형무소에서 옥사하거나 행방불명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피고인들도 있다. 이 사건 재심청구서 등에 따르면 실제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들이 공소사실과 같은 잘못을 하였는지 여부에 대한 치밀한 심의도 없었고, 체포과정에서의 불법성 여부에 대한 논의도 전혀 찾아볼 수 없을뿐 아니라 단순 가담자에 대해서도 일률적으로 형을 선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략) 피고인들의 유족들이 이번 재심을 통해 피고인들의 명예가 회복되어 그 한이 조금이나가 풀리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동안 자신의 부모·형제가 4·3 사건의 희생자가 되면서 유족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정신적 고통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어 왔다. 유족들의 그런 희생이 이번 재심을 통해 어느 정도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피고인에 대해 변호하였다.
이번 재판의 피고인인 망 김00은 1950년 2월 4일 제주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법령 제19호 위반, 내란방조죄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1948년 8월경 민애청 가입, 시위행렬 감행, 폭도에 식량 및 군자금 제공하고 운받했다는 공소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위 변호인의 변호내용과 검사의 증거가 없다는 재판 내용을 바탕으로 이날 75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재판에는 그의 아들 김00이 참석하여 “나는 77세다. 그동안 살아오는 과정에 어머니에게 아버지에 대해 들었다. ‘느네 아방은 아무 죄도 없이 끌려깠져’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옥살이하면서 두들겨 맞았다. 그런데도 6.25 사변까지 참전하여 살아 돌아왔다. 4·3 때는 집이 불타버려 남의 집을 전전하면서 살았다. 나는 큰아들이다 보니 ‘동생들 보라’는 얘기에 내도에서 노형까지 1시간 걸어가서 애기(동생)들 놓고 웡이자랑(자장가)하며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와중에 아버지가 2004년, 어머니가 2003년에 돌아가셨다. 직장에 가려니 빨간 줄이 그어져 있어 직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와중에 4·3과 관련해 대통령이 사과한 덕분에 모든 것이 없어졌다. 이제는 제주도에 평화가 오는 것같아 살맛도 난다. 아버지가 79세에 돌아가셨다. 이제 부지런히 살고,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런 비극이 진짜 없었으면 좋겠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좋은 결과 기대하겠다. 감사드린다”라는 발언을 남겼다.


같은 날 오후 4시 이날의 마지막인 제24차 일반재판 직권재심(2025재고합3)이 진행되었고, 총 20명의 제주4·3희생자 수형인이 무죄를 선고 받았다.
20명 피고인의 변호를 맡은 김정은 변호사는 최종 변론에서 “우리는 지금도 민주주의의 가치와 절차가 얼마나 소중하며 또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되새기는 여러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최근에 많은 경험을 통해 민주주의 제도와 절차는 결코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느끼고 있다. 이 재판은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앞으로 어떤 사회를 지향해야 할 것인지, 국가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오늘의 피고인 중 일부는 특히 그 사연이 깊은 상흔으로 남아있다. 망 김00은 학창 시절 자취 중 본가에 다녀오는 길에 끌려가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 중 사망했다. 어떤 정치활동에 연루된 적 없는 학생이었다. 피고인 망 윤00은 사면으로 형 집행을 마쳤으나, 다시 군경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피고인 망 오00은 정식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이후 예비검속되어 정뜨르 비행장에서 총살되었거나 수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피고인 망 고00은 군에 입대하여 성실히 복무하였고 2011년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내란 전과자라는 오명을 안고 있다. 이처럼 피고인들 상당수는 법적 절차를 통해 형이 확정되었거나 형이 종료된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검거, 총살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이는 단순한 형사처벌을 넘어서 국가폭력의 반복이었다. 피고인들에 대한 무죄판단은 억울한 고통을 겪었던 이들에게 늦었지만, 회복의 기회를 주는 길이며, 이 땅의 법과 정의가 사람의 존엄과 권리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 확고히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이분들의 삶과 죽음 앞에 국가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분명히 밝히는 일이 될 것이다”라며 피고인들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망 김00은 국가보안법 위반, 법령 제19호 위반, 내란죄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는데, 구체적으로는 남로당 가입, 삐라 살포, 시위 행렬 감행 등이었다. 그의 조카이자 양자인 김00은 “나는 4·3사건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그런데 할아버지에게서 모든 것을 들었다. 망인이 된 피고인은 나의 큰아버지다. 집안 사정으로 내가 장손이라 큰아버지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그 기록이 지금 있다. 할아버지 말씀에는 아버지가 국가 공무원이었다. 전혀 이러한 사건에 연루되었을 상황이 아니었다. 처음 내용을 들었을 때는 가슴이 정말 너무 아팠다. 큰아들이 잡혀갔는데, 그 이유를 모르셨다. 얼마 지나 동네 분이 배에 여러 명을 테우고 바다로 나갔다고 한다. 그 이후로 큰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큰아버지가 수장됐다고 믿고 있다. 큰아버지가 잡혀간 날짜가 음력으로 6월 초하루다. 그래서 그날로 정해서 얼마 전에 제사까지 모셨다. 이러한 내용을 오늘 알고, 이거는 아니다. 정말 바로 잡아줘야 한다 ”라고 발언했다.
세 번의 재심재판으로 총 60명의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노현미 부장판사는 “이 사건은 해방 직후 벌어진 4·3의 소용돌이에서 피고인들이 반정부 활동을 했단 명목으로 실형이나 집행유예, 벌금형을 선고한 사건으로 희생자들이 겪은 고초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사건에서 개인의 존엄은 희생되었고, 삶을 피폐해졌다. 희생자들에게 맺힌 억울함이 얼마일지, 가족분들의 숨죽임이 얼마였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지난 재판에서 한 유족분이 한 ‘오늘 법정에 아버님도 와 계실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마음에 남는다. 부디 오늘 재판의 선고가 희생자분들의 억울함을 푸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라며 재판을 마쳤다.
오랜만에 재심재판 방청이라 속기도 빠르지 못하고, 판사도 변경되어 있었다. 이번 재판에서 눈에 들어오는 하나의 장면은 검사가 공소사실 및 변론 내용을 마치 랩하듯 빠르게 읽어 나가는 모습이었다. 매번 피고인만 변경되고 무죄 취지의 검사측 의견 내용이 동일하니 시간을 아끼는 차원에서 빠르게 진행되는 법정이 좋은건가? 재심에 참여하는 판사, 검사, 변호인, 기자나 우리와 같은 4・3관련 단체들이야 매 재판이 거의 비슷한 내용이니 새로울 것이 없고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는 서로 경계하며 이 재판을 손꼽아 기다렸을 유족들을 생각해 반복되더라도 처음 듣는 다고 여기며, 긴 시간을 함께 하자고 했었다. 법정에 찾아오는 희생자 유족 대부분이 고령에 재판정에 처음 와봤을 평범한 사람들이라 모든 것이 어색하고 긴장된다. 무죄가 선고될 것을 알면서도 법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연신 '무죄를 선고해달라' 간절히 부탁하는 유족들도 많다. 그러니 조금 아픈 내용이더라도, 조금 지루해지더라도 70년 넘는 세월 죄인, 죄인의 가족이라는 고통 속에 살아오신 유족들을 생각해서 천천히, 그리고 세심한 재판 진행과 참여를 요청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