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까요?
A.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이된 조천읍 북촌리 마을의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Q. 북촌리는 4·3기간에 토벌대에 의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마을이죠?
A. 네, 맞습니다. 4·3기간 해안마을임에도 함덕에 주둔하고 있던 2연대 3대대 군인들에 의해 마을이 모두 불타고 1949년 1월 17일, 18일, 이틀 동안 400여 명이 희생된 ‘북촌사건’을 겪었습니다.
Q. 숫자만 들어도 북촌리에서 굉장히 엄청난 학살피해가 발생했던 것 같습니다. 현기영 작가는 왜 북촌리를 배경으로한 단편소설 『순이삼촌』을 집필하게 된 거죠?
A. 현기영 작가는 고교 동창으로부터 1949년 1월 17일 북촌리에서 주민 수백 명이 한날한시에 집단 학살당했다는 참혹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취재하러 북촌에 찾아갔더니 찬물을 끼얹은 듯 다들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해주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가가 ‘저승에 가서 무슨 낯으로 그분들(4.3 희생자)을 보잰 햄수과(보려 하느냐)?라며 글 쓰고 널리 알려서 진혼을 하려고 한다‘고 하자 겨우 입을 뗐다고 합니다.
작품이 발표된 1978년은 박정희 유신 독재 정권 시절로, 제주도민 전체가 거대한 국가 폭력의 공포에 질려 4·3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강력한 금기였습니다. 현기영 작가는 작가로서 고향의 이 압도적인 비극을 외면하면 안된다는 압박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유를 먹고사는 작가로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발언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목숨을 걸고 펜을 들었다고 합니다.
Q. 그럼 소설 속 배경이 된 북촌리의 역사에 대해 먼저 설명해주시겠어요?
A. 북포리고도 불리던 북촌리는 일제강점기에 많은 항일운동가를 배출했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항일운동가 출신들이 주도한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131쪽)에 의하면 1947년 8월 13일에는 불법전단지를 단속하던 경찰의 발포에 부상자가 발생했고, 이에 마을 주민들이 경찰에 대항하여 경찰관들을 폭행하고, 함덕지서까지 찾아가 항의 시위를 한 사건을 시작으로 북촌리는 주목을 받게됩니다. 많은 청년들이 구금되었고, 일부는 육지형무소로 보내졌다가 행방불명되기도 했습니다.
Q. 뒤이어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A. 1948년 12월 16일, 북촌리에서 첫 주민 집단학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민보단을 조직해 마을을 지키고 토벌대에 협조하던 주민 22명이 느닷없이 군토벌대에 끌려가 옆 마을인 동복리 지경 난시빌레에서 총살 당했습니다. 제주4·3유적 제주시편에 생존자 허원호(1913년 생, 남)씨의 증언이 있습니다.
1948년 12월입니다. 함덕지서에서 주민들을 동원해 한길가의 가시덤불을 정리하는 작업이 있다고 해서 저도 나갔고, 이상영도 나갔지요. 작업이 끝난 후 북촌국민학교로 모이라고 하더니, 다음날 함덕으로 민보단원들을 오라고 해요. 다음날 저는 아파서 나가지 못했어요. 그날, 함덕으로 간 사람들은 마을에 돌아오지 못했죠. 3-4일 정도 함덕에 있었다고 해요. 그러다 12월 16일 토벌대가 이들을 차에 태우고 동복리 방향으로 가면서 2명을 내려주고, 나머지 주민들은 북촌리와 동복리 사이 난시빌레에서 모두 총살했어요. 그때 이상영(42, 후유장애로 1957년 사망)만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살아돌아왔어요.- 제주4·3연구소, 『제주4·3유적: 제주시편』, 522쪽.
Q. 22명의 주민이 학살된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니까?
A.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의 「4·3은 말한다」에 따르면, 일찍이 경찰과 주민들과의 충돌로 청년들이 잡혀가거나 산으로 숨어 젊은이들이 마을에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부 남아 있던 사람들도 숨어지냈고, 마을 유지들도 ’양면작전‘을 펴며 산에도 협조하고, 토벌대에도 협조하며 피해를 키우지 않으려 했다고 합니다. 주민 윤철정씨의 증언은 이렇습니다.
입산한 우리 마을 청년들이 마을을 보호해 줬기 때문에 산쪽으로부터의 습격은 없었습니다. 또 어른들은 산쪽뿐만 아니라 토벌대에게도 협조하는 ‘양면작전’을 써 강경토벌전을 피했습니다. 아버지가 민보단장일 때 군·경에게 소를 몇 마리씩이나 바치는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④, 전예원, 1998, 437쪽
중산간을 중심으로 초토화가 시작되던 때에 북촌리는 이렇게 피해 없이 지나가는 듯했으나 12월 16일 난시빌레 학살과, 12월 21일 아라리 박성내 학살까지 피해가 이어서 발생했습니다. 이에 대해 주민 이춘보씨의 증언입니다.
이 사건은 토벌대가 함정을 판 것입니다. 웬만한 젊은이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거의가 산에 올랐는데 이들은 산에도 못간 채 집 부근에 토굴을 파 하루하루 숨어지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토벌대는 도저히 젊은이들을 찾을 수 없자 ‘죄가 있든 없든 나와서 자수하면 모든 걸 용서하고 양민이란 증명을 해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함덕 대대본부에 자수했다가 희생된 것입니다.-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④, 전예원, 1998, 438쪽
이러한 함정작전은 지속되어 12월 28일에는 굴을 파 함께 숨어지내던 젊은 여성 5명이 토벌대에 잡혔습니다. 한 명은 요행이 도망쳤으나 고응섭(21), 한석희(21), 김완녀(19), 김정순(19) 4명은 함덕으로 끌려가 이튿날 처형됐습니다. 당시 16세이던 홍순식씨도 함께 함덕으로 끌려갔다 살아돌아왔습니다.
난 군대로 넘겨져 취조를 받았습니다. 내가 어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9연대와 2연대의 교체기인 때문인지 군대에서는 날 풀어줬습니다. 함덕에 머물면서 매일 신상보고를 하라도 하더군요. 그러나 경찰에게 넘겨진 부녀자 4명은 희생되었습니다. 토벌대는 미치광이들이었습니다. 여자들은 총살당한 게 아닙니다. 옷이 모두 벗겨진 채 국부를 칼로 난도질당하는 참혹한 모습으로 숨졌습니다.-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④, 전예원, 1998, 440쪽
Q. 결론적으로 기존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되면서 9연대의 성과 올리기 방편으로 함정작전 등에 주민들이 학살되었군요. 게다가 여성들에게는 더욱 가혹했다는 증언이 있네요. 이러한 잔인함이 서북청년회로 구성된 2연대까지 이어지나요?
A. 맞습니다. 9연대가 떠나고 2연대 3대대가 주둔하게 되는데, 이들 대부분은 서북청년회 출신으로 구성된 특별부대였습니다. 주둔지 일대의 마을들을 초토화하며 잡아 온 주민 중에 젊은 여성들을 골라내 성 착취 후 서우봉 북쪽 끝 절벽에서 총살하여 바다에 수장학살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을 이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서우봉 북쪽 끝 바닷가에 있는 ‘몬주기알’이라는 굴에 어린 여성들이 숨어지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Q. 참 잔인하고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더 비극적인 북촌리 4·3역사가 남아있죠?
A. 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949년 1월 17일 아침에 세화 주둔 2연대 3대대의 중에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합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졌습니다. 그러자 흥분한 군인들이 북촌리를 불태우고 주민 300여 명을 집단 총살한 것입니다. 또한 군인들을 살아 있는 주민들 중 함덕리로 소개해간 북촌리 주민 100여 명을 다음날 총살했습니다. 그래서 이사건을 ‘보복 살상’의 대표적 사례로 진상조사보고서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Q. 군인들은 마을을 불태우며 주민들을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했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서도 학살피해가 있었나요?
A. 네. 북촌국교 운동장에는 1천여 가량의 마을 사람들이 모였는데요. 교단에 오른 현장 지휘자가 먼저 민보단 책임자인 장운관씨를 나오도록 해서 ‘마을 보초를 잘못 섰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즉결처분했고, 학교 양쪽 밭으로 주민들을 끌고가는 과정에서도 도망가려는 주민들에게 계속 총질을 해댔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젖먹이를 안은 젊은 엄마도 희생됩니다. 엄마가 피를 흘리며 생명을 다해갔는데, 굶주린 애기는 엄마가 죽은 줄도 모르고 엄마의 가슴을 파고들어 젖을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 관련하여 강요배 화백의 ‘젖먹이’라는 그림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소설 『순이삼촌』에서 담긴 당시 젖먹이 아이의 장면을 소개해보겠습니다.
머리 위에서 한 발의 총성이 벼락같이 터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사람들은 일제히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서편 울타리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 붙었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몰려가고 난 빈자리에 한 여편네가 앞으로 엎어져 있고 옆에는 젖먹이 아기가 내팽개쳐져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그 아기만 바락바락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영배 각시 총 맞았져”. 누군가 이렇게 속삭였다.
흰 적삼에 번진 붉은 선혈이 역력했다.- 현기영, 「순이삼촌」, 창비, 69쪽
Q. 4·3 당시 대부분의 집단학살이 도피자가족을 가려내어 학살하거나 젊은 청년들이 주 대상이었는데, 북촌리 대학살은 그런 구분이 없었던 것 같아요. 왜 이렇게까지 많은 인명학살이 자행된 것인가요?
A. 사실 당시의 군집행관이나 책임자에게 죄를 물어 집단학살의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4·3 진상규명이 2000년대 초반에야 이루어지면서 아직 명확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당시 경찰로서 대대장 차량 운전수로 차출됐던 김병석 씨의 증언이 당시 군인들의 잔인한 학살의 이유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약 7~8명의 장교가 모였습니다. 그때 “돌담 위에서 박격포를 쏘아 몰살시켜 버리자”는 등 여러 이야기가 나옸어요. 그런 데 한 장교가 “군에 들어온 후에서 적을 살상해보지 못한 군인들이 있으니까 1개 부대에서 몇 명씩 끌고나가 총살을 해서 처리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해 결국 그게 채택됐습니다. (중략) ‘저들을 살려주십시오’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대대장은 “나도 살려주고 싶지만 그러면 어떻게 저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④, 전예원, 1998, 440쪽
결국 이미 집들을 다 불태워 버린 상태에서 그들을 수용할 대책이 없어 죽였으며, 군인 개개인에게 총살의 경험을 주기 위해 총을 사용했다는 증언이었습니다.
Q. 정말 끔찍합니다. 지금 북촌리에는 4·3역사를 기억하자는 의미로 학살터와 추모공간 등이 마련되어 있다고 들었는데요.
A. 네. 지금은 북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서쪽 학살터인 양개왓을 지나면 옴팡밧 그리고 너븐숭이가 나옵니다. 원래는 농부들이 쉬던 너른 돌판이 있는 곳이라해서 ‘너븐숭이’라 지어졌는데요. 이곳에 2007년에 ‘너븐숭이 4·3기념관’을 조성하여 방문자들에게 북촌리의 4·3역사를 알리고 있습니다. 기념관 인근에 학살터인 ‘옴팡밧’에는 북촌의 역사를 세상에 알린 소설 『순이삼촌』 문학비가 세워졌있고, 바닷가에는 북촌리 4·3희생자 위령비, 일주도로변에는 어린 4·3희생자들도 함께 묻혀있는 ‘애기무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북촌초등학교 동쪽으로는 학살터 ‘당팟’이 있고, 당팟 남쪽 일주도로변에 세워져있는 비석들에는 4·3 당시 빗발친 군인들의 총알 자국이 남아있습니다.
Q. 북촌리 4·3희생자 명단을 보면, 이름 없이 누구누구의 처, 자, 녀, 심지어 모까지 일가족이 모두 희생된 사례가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이들의 죽음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제주4·3의 진실을 찾고, 희생자의 명예회복의 시작까지 참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A. 네. 왜 이렇게 오랫동안 제주도민들은 침묵을 강요당했을까,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순이삼촌』을 쓴 현기영 작가도 여기에 대한 생각을 소설에 남겼는데요.
그러나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삼십년 동안 여태 단 한번도 고발되어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가 그건 엄두도 안 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군 지휘관이나 경찰 간부가 아직도 권력 주변에 머문 채 떨어져 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섬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섣불리 들고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려웠다. 고발할 용기는 커녕 합동위령제 한번 떳떳이 지낼 뱃심조차 없었다.- 현기영, 「순이삼촌」, 창비, 86쪽
실제로 북촌리에는 4·3의 아픔이 끝나갈 무렵에 일명 ‘아이고 사건’이 벌어지며 더욱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1954년 1월 23일, 한국전쟁 전몰장병인 김석태씨의 고별식이 열린 날, 상여가 마을을 돌던 와중에 북촌초등학교 교정에 도착하게 됩니다. “오늘은 6년 전 마을이 소각된 날이며, 억울한 죽음을 당한지 6주년 기념일이니 희생된 영혼을 위해 묵념을 올리자”는 한 주민의 제안에 무력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 설움에 북받친 주민들이 대성통곡을 한 것이 경찰에 알려지면서 당시 신승빈 북촌리 이장과 주민들이 끌려가 조사를 받고, 반성문을 쓰고서야 겨우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Q.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있었다면, 살아남은 사람들도 정말 고통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A. 북촌리 대학살로 마을은 ‘무남촌’으로 불렸고, 음력 12월 19일만 되면 마을 전체가 제삿를 치르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던 곳입니다. 그러니 폐허가 된 마을을 복원하여 지금이 있기까지 살아남은 여성들의 희생 또한 엄청나게 컸습니다. 4·3성을 쌓는 일, 집을 다시 짓고,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시키는 일까지 생존한 사람들의 헌신의 결과로 지금의 북촌리가 됩니다. 이들의 트라우마 또한 엄청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 『순이삼촌』의 주인공인 순이삼촌이 자신의 가족이 희생된 옴팡밧에 돌아와 자살을 하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옴팡밭에 붙박인 인고의 삼십년, 삼십년이라면 그럭저럭 잊고 지낼 만한 세월이건만 순이 삼촌은 그러지를 못했다. 흰 뼈와 총알이 출토되는 그 옴팡밭에 발이 묶여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당신이 딸네 모르게 서울 우리 집에 올라온 것도 당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그 옴팡밭을 팽개쳐보려는 마지막 안간힘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여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삼십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삼십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삼십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현기영, 「순이삼촌」, 창비, 94쪽
Q. 그럼에도 지금의 북촌리는 4·3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무척 적극적인 마을인 것 같습니다. 모든 마을이 이럴 것 같지 않아요. 북촌리는 무엇이 다를까요?
A. 1960년 4·19 이후 국회 차원의 양민학살 진상규명 사업이 실시될 때에도 북촌리는 실태조사 내용을 전달하는 등 적극적이이었습니다. 1999년 「4·3특별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그 노력은 계속되어 2007년 ‘너븐숭이 4·3기념관’ 건립, 2008년 상생·평화·번영 탑 건립, 2017년에는 북촌리 4·3길을 개통하여 적극적으로 4·3역사를 알리고 있습니다. 북촌리4·3희생자영위비 뒤편의 글처럼 “이제 우리는 무자년의 그 참사를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하여, 용서하지만 잊지 않기 위하여,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배우고, 전쟁 반대의 이름으로” 4·3의 역사를 알리고 있습니다.
권력에 맞서 진실을 찾아가는 길은 정말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잔인한 역사의 아픔에도 이를 직면하고, 평화와 인권의 교훈을 알리기 위해 북촌리 주민들의 용기와 노력이 더 오래오래 기억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