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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3일. 신촌/조천 답사 코스 1​

신촌 4·3 성 -> 신촌향사 -> 조천읍 비석거리 -> 조천리 민간수용소 옛터 -> 연북정 -> 조천 야학당 -> 조천중학원 옛터 (현 조천보건소) -> 조천지서 옛터(현 조천파출소) -> 면민관 -> 조천지서 옛터 앞 밭
신촌 조천 답사 코스 지도
2019. 2. 18. 답사 코스

제주다크투어는 지난 2월 13일 조천읍 4·3 유적지를 둘러보고 왔습니다. 2003년 제주 4·3 연구소와 제주도가 발행한 <4·3 유적지 I>에 나온 유적지들과 강호진 운영위원이 기자 시절 방문했던 4·3 유적지들을 다시 한 번 찾아가 기록하기 위한 첫 시작이었습니다.

신촌리는 신촌회담을 통해 제주4·3 항쟁을 결의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촌 4·3성터 오르는 길
신촌 4·3성터 오르는 길

일제강점기, 제주에서 항일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펼치면서 결국에는 조천 만세운동을 일으킨 곳, 바로 조천읍입니다. 해방 이후에도 제주도 인민위원회 등을 통해 통일운동을 이어가면서 4·3이 일어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지역 중 하나입니다.

이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 둘을 꼽자면 안세훈과 이덕구입니다. 안세훈은 일제강점기 조천 만세운동을 직접 경험하며 민족의식에 심취, 대중 항일운동을 전개해온 인물입니다. 해방 이후에는 자치기구인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덕구는 제주4·3 당시 김달삼을 이어 인민유격대(무장대) 2대 사령관으로 활약했습니다. 4·3 발발 당시 조천중학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한라산에 입산, 인민유격대를 이끌며 제주읍, 조천읍, 구좌읍을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번 답사는 조천읍 신촌리에 남아 있는 4·3 성터를 처음 찾았습니다. 최근 발행된 신촌향토지에 따르면 이 성은 신촌리 닭머르 해안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당시 성은 신촌서부 닭모르(앞개알)에서 남생이못, 말동산 서거리 조천경계까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곳이 성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신촌리에서 조천리까지 쌓았던 성터는 해안을 따라 군데군데 남아있지만 점차 흔적을 감춰가고 있습니다. 현재는 이 근처 해안에는 80m만 남아있을뿐, 관련 이정표나 안내판 조차 마련돼 있지 않습니다.

신촌 4·3성터
신촌 4·3성터
무장대의 진입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 성담인데 이 성담을 쌓는 과정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생각해본다. 남자들은 큰 돌을 굴러와 밑기둥을 쌓고 여자들은 가마니와 마대 골채 등을 이용하여 작은 돌로 메우면서 이중벽담 쌓는 공법으로 넓이 약 2m와 높이 약 3m의 높이로 쌓았다.
- 신촌향토지 p132, 2017

이어 신촌 향사를 찾았습니다. 신촌향사는 조선시대 마을의 '리사무소'였습니다. 1977년까지 이 건물은 신촌리 사무소로 쓰였습니다. 1805년에 지어져 보존가치가 높다고 판단, 제주도문화재로 등재되었습니다. 이 곳에는 현재 마을 주민이 살고 계십니다.

신촌향사
신촌향사
조천과 애월은 예로부터 제주의 관문이었다.
육지로 나가고자 하는 이들은 여기에서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고,
전라도를 경유하여 제주에 들어오는 이들도 모두 이곳과 애월포에 배를 댔다.
조천(朝天: 조선의 하늘)이라는 지명도 이와 무관치 않을 터이다.
- 연북정 (답사여행의 길잡이 11 - 한려수도와 제주도, 초판 1998., 14쇄 2008.,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박종분, 김성철, 유홍준, 김혜형, 정용기)

조천리는 조천 주민들의 4·3 당시 수난사를 비롯해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조선시대 유배문화를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유서깊은 마을입니다.

조천리 마을 중심부 오거리에 들어서니 비석들이 퐁낭(팽나무) 아래 도열해 있습니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이 곳 팽나무 아래에서 이웃들과 만나 비석에 쓰인 글씨를 읽으면서 역사 깊은 마을 주민이라는 자부심을 느끼며 대화를 나눴을 테지요.

조천읍 비석거리
조천읍 비석거리

조천은 제주성과 가까운 곳으로 교통수단을 바닷길에 의존하던 시절, 목사나 판관 등 많은 관리가 이 마을 통해 드나들었습니다. 그들의 치적과 석별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이 곳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이 거리를 주민들은 비석거리라 합니다. 이 거리에만 비석이 7기나 있습니다. 제주도 기념물 제 31호인 조천비석거리는 주로 조선후기 이후에 건립되었습니다.

선정을 베풀었던 수령들이 떠난 뒤에 주민들이 그들을 생각하여 세웠던 비석들을 한 곳에 모았다고 하는데 과연 수령들의 진실된 마음으로 목민과 구실을 하였는지, 고을민들이 자발적인 심정으로 이들 비석을 세워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하네요. (출처 제주관광공사) 조선시대 당시 제주민들은 중앙의 수탈에 힘들어 했다고 하니 비문에 쓰인 글을 모두 믿기는 힘든 일이지요. (출처 : 제주관광공사)

비석거리에서 북쪽 해안으로 조금만 내려오다보면 제주4·3 당시 집단수용소로 쓰였던 정미소 옛터가 남아 있습니다. 이 민간수용소 옛터는 40~50평 규모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사유지로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조천리 집단수용소 옛터
조천리 집단수용소 옛터

1948년 11월 하순 이후 조천면 중산간 마을이 소개되면서 주민들은 해변마을인 조천과 함덕으로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중산간 마을의 청년들은 이전 토벌대의 횡포를 겪으며 내려와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 대부분이 야산의 동굴 등지에 숨어 지내게 됩니다. 은신 등으로 인해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사라진 중산간 주민들은 함덕, 조천의 집단수용소에 수용되지요.

조천리 집단수용소엔 조천리 지경의 중산간인 양천동, 신안동, 봉소동은 물론 대흘과 와흘 등지의 도피자가족도 수용생활을 했습니다. 이웃 해변마을인 신촌, 신흥 등지의 도피자가족도 수용됐습니다. 그 숫자는 200~300백명은 족히 됐을 것이라 전해집니다.

한편 이곳에선 조천리민이 경찰에 돈을 주어 수용자를 빼내려다 발각되어 총살당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수용됐던 중산간 주민 중 젊은이들은 수시로 선별 총, 어린이, 노약자를 포함한 도피자가족 30명이 1949년 1월 13일에 또 60여명이 1949년 2월 1일에 조천지서 앞밭에서 집단총살 당했습니다. (출처: 4·3 연구소, 제주도 <4·3 유적 I>, 2003) 개인 사유지이기도 하지만 이정표 하나 없어 당시 역사적 현장이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조금 더 바다 쪽으로 걸어가봅니다. 조천 항구로 나아가면 높게 쌓여져 있는 연북정이 보입니다. 그리워할 연, 북녘 북. 즉 임금이 있는 북녘 한양을 그리워하던 제주 파견 관리 도는 유배인들이 자주 오르던 곳입니다. 이 곳은 사실 제주4·3과는 큰 연관은 없는 문화유적입니다. 하지만 제주민들이 각종 조세를 수탈해 한양으로 가져가는 통로였다는 점에서 당시 옛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그려보게 됩니다.

연북정
연북정

당시 마을길로 돌아와 옛 주민들의 흔적을 찾아가봅니다. 아까 들렀던 비석거리를 지나 남쪽으로 내려오면 조천관이 있습니다. 이곳은 이곳은 육지를 왕래하는 명사나 귀빈들이 머무르거나 제주산 마필 등 조공품 또는 생필품을 육지로 보낼 때 공무를 보던 곳이었습니다.

그 곳 바로 맞은 편에는 조천 야학당이 있습니다.

조천야학당
조천야학당

조천 야학당은 1925년 6월 1일 항일운동가 김시용, 김시균 선생 등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마을 청소년들에게 한글과 수학을 가르치며 문맹을 물리치고 근대의식과 항일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교육의 장이었습니다. 1929년 조천 야학당에서는 조천청년동맹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부녀자들을 위한 야학을 열었고 마을 청년과 부녀자들을 상중동반, 중동반, 하동반 등 3개 반으로 나누어 교육시켰다고 합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을 당시 옛 건물이 아닌 2009년 7월에 복원한 것입니다. (출처 : 조천 야학당 터 앞 안내문) 현재 이 공간은 마을 주민들을 위한 교육 센터 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취지를 이어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좋지만 옛 흔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은 아쉽습니다.

비석거리에서 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사거리까지 올라오면 조천중학원 옛터가 있습니다. 현재는 조천보건지소가 자리잡았습니다. <4·3 유적 I>에 따르면 조천중학원은 그 시기 다른 지역의 중학원과 마찬가지로 지역 유지와 주민들의 자발적인 힘에 의해 1946년 3월에 설립된 학교입니다.

교사들은 대부분 일본 등지에서 공부한 인재들이었습니다. 조천중학원은 1947년 3․1절 시위 및 총파업 이후 미군정과 서청의 탄압을 받아 사실상 수업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교사와 학생들이 수시로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경찰의 감시도 심했습니다.

이 와중에 1948년 3월 6일 2학년 김용철(당시 21세)이 조천지서에 잡혀간지 이틀만에 취조 중 숨지는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5․10선거 후에는 교사와 학생들이 대부분 피신했으며 이후 조천중학원은 '빨갱이학교'라 하여 폐원조치됐습니다.

지금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지 않아 이곳이 조천중학원의 위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런 안내판도, 흔적도 없는 옛터 앞에서 당시 불의에 저항했던 조천중학원 학생들을 떠올려 봅니다.

조천중학원 옛터
조천중학원 옛터

조천중학원 맞은 편에 옛 조천지서가 있습니다. 지금은 조천파출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조천지서 옛터
조천지서 옛터

1903년부터 연북정에 경찰관 주재소가 있다가 1933년부터 현재 위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 주재소는 1945년 10월 국립경찰 창립과 더불어 제8관구 22구경찰서 조천지서로 발족했습니다. 4·3 당시 경찰 및 응원대의 활동 근거지가 됐으며 피의자에 대한 취조 및 학살이 자행된 곳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조천중학원 학생, 김용철이 고문 끝에 사망한 곳도 이곳입니다. 당시 직원 5명 모두 3~5년의 징역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또 1948년 4월 3일 무장대가 지서를 습격했으나 지서 경찰관의 선제 사격으로 피해가 없었습니다. 1948년 4월 4일 무장대로부터 재습격 당해 교전 중 1명의 무장대원이 사망하고 2명의 경찰관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출처: 4·3 연구소, 제주도 <4·3 유적 I>, 2003)

파출소 뒤편으로는 당시 지서 외곽을 축성한 성담과 총구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무장대의 습격으로부터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4․3 발발 이후 다급해진 지서가 주민들을 동원해 축성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조천파출소 뒤 쪽 남아있는 성담
조천파출소 뒤 쪽 남아있는 성담
조천지서 벽에 남아있는 총구
조천지서 벽에 남아있는 총구

그리고 최근에는 보수단체들이 조천파출소 앞에 비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최근 들어 옛 지서 자리 앞에 이렇게 표지석을 세우고 있습니다.

보수단체가 세운 조천지서 표지석
보수단체가 세운 조천지서 표지석

조천지서가 주민들을 학살한 흔적은 인근 조천읍 면민관 옛터에 남아있습니다. 조천읍이 면(面)이었을때 주민들의 모임 공간으로 쓰였던 곳이 이 곳 면민관 옛터입니다. 면민관을 포함한 인근, 조천지사 앞밭이 학살터였다고 합니다. 면민관은 한때 가구점, 극장 등으로 쓰였다고 하는데요. 현재는 자동차공업사로 쓰이고 있습니다. 소개령에 따라 조천리에 피난 왔던 신안동, 양천동 등 조천리 산간마을뿐 아니라, 대흘리, 와흘리 등 중산간에서 소개 온 대부분의 주민을 집단수용소에 수용한 후 그 중에서 도피자가족을 골라내 집단 학살했습니다.

조천 면민관
조천 면민관

이 건물 뒤편 밭 한 가운데 흙봉분 2기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곳에 종합운동장이 건립되면서 흙봉분은 사라졌고 지금은 어디로 옮겨졌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조천 지서 옛터 앞 공터
조천 지서 옛터 앞 공터

위에서 조천읍 민간인 수용소, 조천중학교 옛터, 조천지서 옛터(현 조천파출소), 그리고 조천지서 앞밭 민 면민관까지 한번에 보면 삼각형 구도로 이뤄져 있습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삶과 죽음이 엇갈린 순간들이었겠지요.

​- 조천읍 답사기는 다음 편(함덕리)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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