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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서 본 해안가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서 본 해안가
제주다크투어 활동가들은 지난 2월 6일부터 10일까지 오키나와 평화기행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제주다크투어는 이번 답사를 바탕으로 오키나와 평화기행 프로그램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제주와 닮은 점이 많은 오키나와. 그 역사의 현장을 많은 분들과 함께 기억할 수 있는 기행으로 준비해 보겠습니다! 활동가들의 4박 5일 답사기를 공유합니다.
오키나와 답사 지도입니다

오키나와 평화기행 답사 지도

이 링크를 클릭하시면 제주다크투어 활동가들이 방문한 답사지와 관련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제주에서 오키나와로 가는 직행 비행기가 있다면, 한시간이면 도착할 만큼 두 지역은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직항편이 없어 지난 2월 5일 제주에서 김포를 거쳐, 인천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오키나와로 출발했습니다.

'분명 제주에서는 겨울 옷을 입었는데...' 오키나와에 내리자 두꺼운 외투를 입고 온 것이 민망해질만큼 따뜻합니다. 2월의 오키나와는 선선한 초가을 날씨입니다.

공항 도착게이트로 나오자, 오늘 함께할 모치즈키 사토시 목사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환영 제주다크투어'라는 팻말을 들고 말이지요. 모치즈키 목사님은 일본 시즈오카 출신인데 신학교 시절 오키나와에서 목회를 시작해 이제는 오키나와에서 산 시절이 고향 시즈오카에서 산 시간보다 더 길어진 '오키나와 사람'입니다. 한국어가 유창한 모치즈키 목사님은 한국 활동가들이 오키나와에 올 때마다 종종 평화기행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우리 일행은 렌트카를 타고 나하공항에서 40분을 달렸습니다. 오키나와 본섬 남쪽 끝, 이토만에 있는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을 둘러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평화기념공원은 오키나와 전투 최후 격전지라고 하는 마부니 언덕에 세워져 있습니다. 제주4.3을 알기 위해 4.3 평화기념관을 찾는 것처럼 오키나와 전투를 이해하기 위해서 오키나와 평화기념관에 처음 들렀습니다.

한국인위령비 제단의 모습입니다
한국인위령비 제단의 모습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위령비의 휘호를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평화기념공원에 들어가기 앞서 한국인위령탑을 먼저 찾았습니다. 평화기념공원 입구 바로 맞은편에 있는 이곳은 동그란 돔처럼 생겼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 징용되어 오키나와에서 희생된 한국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대한민국 각 지역에서 가져온 돌로 주변을 동그랗게 감쌌는데 자세히 보니 제주도에서 왔을법한 현무암도 보입니다. 각지에서 끌려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당시 오키나와에서는 1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강제로 끌려와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82명, 대한민국 382명의 이름만 평화기념관에 새겨져 있습니다.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평화의초석 개요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평화의초석에 대한 개요입니다. 1995년 6월 23일 오키나와 전투 50주년을 맞아 국적, 사회적 지위 등에 상관없이 이름을 각명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평화의초석 개요
2019년 6월 기준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초석에는 오키나와인 14만 9529명, 조선인 464명 등 총 24만 1566명의 이름이 각명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치즈키 사토시 목사님의 해설을 따라 내부 전시도 둘러 보았습니다. 오키나와 전투 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쟁을 둘러싼 전후의 정세를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알고 싶었던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전쟁이 일어났는지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당시 일본군들이 오키나와를 어떤 목적으로 활용했는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재합니다.

모치즈키 사토시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 일본이 전쟁 당시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은 결여되어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 이후 오키나와 미군정 통치기와 '본토 복귀' 이후 오키나와의 모습을 전시한 제 5관(Room5 : Okinawa, Keystone of the Pacific)은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 전의 전시실에서는 전쟁으로 피해입은 사람들의 모습을 '처연하게' 그리고 있다가 갑자기 미군정, 본토 복귀 후 오키나와 전시실에서는 활기가 넘처 흐릅니다. 미군정 통치를 거치며 경제 호황기에 오른 오키나와의 사회경제적으로 아주 발달했다고 평가하면서. '본토 복귀' 이후 일본이 오키나와의 발전을 위해 정부가 많은 예산을 투입해 오키나와가 현대화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과연 오키나와 주민들도 그렇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전시물들은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가리고 싶었을까요? 누구의 입장에서 오키나와 전투를 그리고 있는걸까요? 전쟁의 기억을 국가가 기억하고 싶은대로만 기억하는 것은 아닌지. 전쟁에 대한 공공의 기억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상설전시실 제5관에 대한 설명(출처 : www.peace-museum.pref.okinawa.jp/english/museum/parmanent/5.html)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상설전시실 제5관에 대한 설명(출처 : www.peace-museum.pref.okinawa.jp/english/museum/parmanent/5.html)
오키나와 평화의 비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분들을 기리는 평화의 비에는 많은 꽃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각명비
평화의 초석에는 총 464명의 조선인들의 이름이 각명되어 있습니다.
준비해 가져간 소주를 각명비 아래에 뿌리며 희생자들의 영면을 기원했습니다.
활동가들은 준비해 가져간 소주를 각명비 아래에 뿌리며 희생자들의 영면을 기원했습니다.

평화의 초석으로 향합니다. 평화기념공원 외부에 있는 이곳에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전세계 희생자들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된 오키나와 주민들의 이름이 각명되어 있습니다. 각명된 이름은 2019년 5월 기준 24만 1500여명에 이릅니다. 이 평화의 초석이 의미있는 것은 민간인 희생자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이름까지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다 새겨져 있다는 것이지요. 이름을 다 새기지 못한 4.3 평화공원이 떠오릅니다.

공원 끄트머리에는 당시 강제로 끌려왔다가 희생되신 조선인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습니다. 두 개의 나라로 분단된 우리의 현실은 이곳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의 나라, '조선'에서 끌려왔지만 지금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이름 아래 나눠어져 기록되어 있습니다. 희생된 조선인들은 과연 과연 이 현실을 어떻게 내려다보고 있을까요.

준비해간 소주를 꺼내어 뿌렸습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비석 그 둘 사이에서 잠시 영령들을 위로했습니다. 갈라진 한반도의 역사, 분단을 반대했던 제주도 인민유격대의 목소리가 마음을 울컥하게 만듭니다.

더 이상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더 많은 분들과 역사를 기억하며 평화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다짐을 올렸습니다. 영령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무거운 다짐을 내려놓고 나왔습니다.

오키나와 이토만의 남쪽, 태평양의 구름이 걷히는 듯 했습니다.

가카즈고대 전망대에 오르는 길 옆, 오키나와전투 당시 총탄의 흔적이 있는 민가의 벽을 보전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가카즈고대 전망대에 오르는 길 옆, 오키나와전투 당시 총탄의 흔적이 있는 민가의 벽을 보전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가카즈고대에 오르는 길엔 벚꽃이 피어있었습니다
가카즈고대에 오르는 길엔 벚꽃이 피어있었습니다

차를 타고 오키나와 북부로 향합니다. 사탕수수밭과 철책 선을 끼고 있는 왕복 2차선 도로를 내달렸습니다.

이따금씩 눈에 들어오는 사탕수수밭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오묘해졌습니다. 오키나와의 사탕수수밭 어딘가에 오키나와에 강제 징용되어 끌려간 희생자들의 넋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탕수수밭 건너편에는 일본 자위대 기지, 미군 기지가 보입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처연함을 떨쳐버리려 애를 썼지만 삶터를 빼앗긴 오키나와 주민들과 그의 선조들의 모습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시민을 지켜주지 않은 군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하고 온 몸으로 평화를 위해 저항하는 곳. 군대로, 힘으로, 무력으로 절대로 평화를 만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오키나와입니다.

가카즈고대 전망대에서는 후텐마기지에서 뜨고 내리는 전투기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카즈고대 전망대에서는 후텐마기지에서 뜨고 내리는 전투기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카즈고대에 도착했습니다. 가카즈고대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 격전이 있었던 곳입니다. 총탄 흔적이 남아있는 민가 벽이 당시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잔디광장에는 초등학생 아이들이 시끌벅적 뛰놀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계단을 걸어 올라가니 아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계단 옆에는 일본군이 1944년 가카즈 지역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만든 진지동굴(진치고)가 있습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아침저녁으로 동굴 건설에 동원되었다는 이야기는 제주에 만들어진 일제강점기 진지동굴 이야기를 똑 닮았습니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당시 만든 토치카도 눈에 띕니다. 토치카는 러시아로, 콘크리트나 흙주머니 따위로 단단하게 쌓은 사격 진지를 의미하는데요. 성인이 기어야만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은 입구를 통과하면 한 평 남짓한 공간이 나옵니다. 길쭉한 총안 두개가 앞에 보입니다. 몸을 굽혀 토치카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총알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이 또한 제주에 있는 진지동굴을 떠올리게 합니다.

후텐마 기지에 전투기가 착륙하고 있습니다
후텐마 기지에 전투기가 착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현장은 아닙니다. 가카즈고대 전망대 정상에 오르면 미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는 후텐마 기지가 눈 앞에 펼쳐집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기지로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그때, 온 몸을 울리는 묵직한 전투기 소음이 들려옵니다. 후텐마 기지로 돌아가는 전투기들이었습니다. 한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4대의 전투기가 뜨고 내렸습니다. 후텐마 기지 활주로에는 추락사고가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 '미망인 제조기'라는 이름까지 붙은 오스프리 몇 대가 보입니다. (미망인이라는 단어는 '남편과 함께 죽어야 하는데 아직도 죽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남성 중심적 가치관으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이제는 미망인이라는 단어 대신 고 아무개(씨)의 부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글에서는 오스프리에 붙여진 별명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부득이하게 미망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2004년 8월에는 주일 미군 해병대의 헬리콥터가 인근 마을에 추락하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주민들은 다치지 않았지만 오키나와 국제대학에 추락한 이 헬리콥터 때문에 후텐마 기지 폐쇄 목소리가 들끓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기지 폐쇄는 이뤄지지 않았고 실제로 이뤄질지도 미지수입니다.

현재 제주에는 제2공항 건설이 정부에 의해 강행되고 있습니다. 최근 제주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제주 제2공항이 공군기지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는데요. 서귀포 강정 해군기지에 이어 공군기지까지 들어선다면 제주도 오키나와와 같은 길을 걷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미 강정마을은 기지와 함께 살아가면서 갈등을 온 몸으로 겪어내고 있습니다.

가카즈고대 한쪽에는 청구의 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가카즈고대 한쪽에는 청구의 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토치카에 직접 들어가 보았습니다
토치카에 직접 들어가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녀온 곳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과 가카즈고대는 오키나와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줍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75여 년, 아니 더 오랜 시간동안 일본과 미국의 요충지(Keystone)으로 활용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오키나와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요.

총칼을 겨누고 싸웠던 일본과 미국이 굳건한 우방국이 되어, 오키나와를 발판으로 그들의 영향력을 키우려고 하고 있다는 점만 달라졌을 뿐입니다.

오키나와에서 제주와 동아시아를 생각합니다. 오키나와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곳곳이 전장이었고, 그곳은 다시 국가안보라는 이유로 또 다시 전쟁을 준비하는 곳이 되고 있습니다. 군대가 시민을 지켜주지 않아서 시민의 힘으로 서로를 지키고 평화의 메세지를 전달해야 하는 현실이 어찌보면 서글프기도 합니다.

"우리는 전쟁 옹호자들에게 평화를 간청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평화를 수락시키기 위해 여기에 모였다". 세계 평화 평의회 초대 총장이었던 프레데리크 졸리오 퀴리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남긴 말입니다. 평화는 절대 무기로 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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